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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영변호사 Feb 21. 2021

하마터면

인생은 선물

살다 보면 우리의 힘으로 좌우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휴”하며 놀란 가슴을 쓰다듬는 구사일생의 체험은 역설적으로 삶이란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아름다운 선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자그만 것에 노심초사하며 바둥바둥 살다가도 불현듯 언젠가의 위태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면, 다시 마음을 바로 잡고 “초심으로 돌아가야지”하는 삶의 복원력이 생기기도 한다.


살면서 그런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하마터면 물에 휩쓸려 갈 뻔했다


6세였을까? 가장 어린 시절 처음 마주친 첫 위기는 홍수였다.


어느 여름 어머님과 함께 시골에 있는 외가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는 시골에 버스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외가를 1년에 겨우 한 두 번 갈까 말까 했다.


고향집을 출발한 지 한 참 만에 외가 마을 근처에 도착했다.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마을 앞에 흐르는 냇가를 건너야 했다.


당시에는 냇가에 교량 하나도 없었다. 냇가에 덩그러니 징검다리만 놓여 있었다. 평상시에는 징검다리만 건너면 되었는데 어머님과 함께 갔던 날은 공교롭게도 많은 비로 홍수가 흘러 징검다리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흙탕물로 범벅이 된 황토색 홍수는 냇가의 양 가장자리까지 차올라 큰 물을 이루며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어머님은 순간적으로 고민을 했다.


그냥 여기서 돌아갈 것인가? 다른 군 지역으로 시집간 어머님이 친정에 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큰 마음먹고 찾아온 오랜만의 방문길이었다. 그냥 건너기로 했다.


어머님은 치마를 위로 걷어 올린 후 나를 등에 업고 홍수가 흐르는 물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처음 물에 들어갔을 때는 큰 염려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홍수가 된 물살이 너무 셌다.


냇가 안쪽으로 들어 갈수록 힘이 부쳤다.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몸이 물살에 밀리며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머님은 나에게 어머님의 목을 꽉 붙잡으라고 큰소리쳤다. 그렇게 그냥 떠내려가면 홍수에 익사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님은 있는 힘을 다해 물속에서 몸을 움직였다.


물을 반대로 거스르는 대신에 물의 흐름을 따라가며 조금씩 가장자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한참을 허우적거리며 냇가 아래쪽으로 떠내려가다 간신히 가장자리에 자라고 있는 냇가의 나뭇가지들을 붙잡고 둑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어머님의 등에 업힌 나이를 생각해 보면 아마 여섯 살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이후 홍수는 나의 잠재의식에 트라우마가 되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엄청난 홍수가 나를 덮치는 꿈을 꾸며 악몽에 시달린다. 그냥 홍수가 아니다. 동네를 다 뒤덮고 그야말로 산꼭대기까지 차오른 물에 쫓기거나 허우적대는 꿈이다.


하지만 만약 그때 어머님이 그냥 물에 떠내려가거나, 내가 어머님 등에서 물속으로 떨어졌더라면 이후의 내 삶은 채워지지 않은 백지로 남았을 것이다. 홍수에 휩쓸려 사라질 뻔 한 삶을 선물로 받은 첫 사건이다.


하마터면 파리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다


중학교 1학년 때 파리 한 마리 때문에 파리 목숨이 될 뻔한 일이 있었다.


시골 고향집에서 어머님이 송아지를 키웠다. 이모가 어머님께 돈을 대어 송아지를 사 주었는데, 송아지를 잘 키운 후 팔아 남는 돈을 둘이서 나누기로 되어 있었다.


송아지를 집 헛간에서 키웠다. 헛간 앞 출입구에는 송아지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통나무를 가로 세로로 세워 막아 놓았다.


둥근 통나무 바로 밑에는 송아지 먹이통(구유)이 있었다. 나무는 썩을 수 있기 때문에 먹이통은 단단한 시멘트로 만들었다.


무더운 여름 뜨거운 태양빛이 마당을 내리쬐었다. 어머님과 큰 형은 집 마루에 걸터앉아 수박을 먹으며 푹푹 찌는 더위를 피하였다. 그리고 우물에서 떠온 시원한 물에 미숫가루를 섞어 시원한 콩국물을 만들어 형님과 함께 벌컥벌컥 들이켰다.


수박과 미숫가루를 먹은 후 햇빛 쨍쨍한 마당을 가로질러 헛간으로 갔다. 헛간에서 송아지가 바닥에 비스듬히 평화롭게 누워 먹었던 풀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쇠파리 떼들이 송아지 몸에 달라붙었다. 송아지가 꼬리를 연신 이리저리 흔들어 대며 파리를 내쫓았다.


하지만 파리는 잠시 허공으로 쌩하게 몸을 피한 후 이내 다시 송아지 몸에 내려앉아 송아지를 귀찮게 굴기 시작했다. 송아지가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파리채를 들고 송아지에게 다가갔다. 파리채로 송아지 몸에 붙어 있는 파리 한 마리를 찰싹 때려잡았다. 파리들이 여러 마리이기 때문에 다 잡을 때까지 송아지 옆에 있기로 했다.


둥근 통나무 위에 걸터앉아 파리가 송아지에 달라붙는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머님과 큰 형은 여전히 마루에 앉아 더위를 식혔다.


어쩌다 갑자기 미끄러운 통나무 위에서 몸이 중심을 잃게 되었다. 그 이후로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몸은 땅바닥에 누워 있는데 깜짝 놀란 어머님과 큰 형이 부르는 소리만 귀에 들려왔다. 몸을 움직이려 해도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의식 없이 병상에 누워 있는 분들도 귀로는 다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몸소 체험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끄러운 통나무 위에서 내 몸이 중심을 잃고 떨어지며 뒤로 한 바퀴 돌았고, 그 때문에 내 뒷머리가 바로 밑에 있는 시멘트 구유에 부딪쳤다. 한마디로 뇌진탕이었다.


조금만 더 세게 부딪쳤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파리 한 마리 때문에 잃을 뻔한 소중한 생명을 선물로 받은 두 번째 사건이었다.



하마터면 차바퀴 때문에 온 가족이 위험할 뻔했다


결혼 후에도 구사일생의 순간이 있었다. 이때도 무더운 여름이었다.


아내와 두 살, 다섯 살 된 어린 두 딸과 함께 경부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여름휴가를 맞아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조수석에 아내가 앉아 있고, 두 딸은 뒷좌석에서 졸며 편안히 쉬고 있었다. 날씨는 찌는 듯이 더웠다. 에어컨을 켜야 하지만 딸이 감기 기운이 있어 틀 수도 없었다. 너무 더워 겉옷을 벗고 그냥 러닝 셔츠 차림으로 운전을 했다.


시속 10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주행하고 있었으며 서서히 더 가속을 하던 중이었다. 차는 2차선 고속도로 커브길 부근에 다가가고 있었다.


운전 중에 오른쪽 차로를 한번 흘낏 쳐다보았다. 옆 차로에 자가용 한 대가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옆 차로의 운전자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며 무어라 우리 차를 향해 큰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해서 손짓하며 우리를 향해 뭔가 소리쳤다. 속이 뜨끔했다. 더운 여름이라고 러닝 셔츠만 입고 운전하는 나를 보고 욕을 하는 듯했다. 아내는 그냥 무시하라고 했다.


그렇게 계속 앞을 향해 달리는데 그도 지지 않고 우리 차를 계속 따라왔다. 여전히 그는 손을 창밖으로 휘저으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낌새를 차린 아내가 그의 손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의 손은 우리 차 앞바퀴 쪽을 향해 가리키고 있었다. 아내가 급히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차 앞쪽을 살폈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오른쪽 앞바퀴가 펑크가 난 것이었다. 그것도 전혀 모르고 나는 시속 100 킬로미터에서 시속 120 킬로미터로 가속하며 고속도로 커브 길을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바퀴가 펑크 났다는 아내의 말에 깜짝 놀라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다행히 뒤에 따라오는 차량이 없었다. 서서히 고속도로 갓길로 차를 세웠다. 가족 모두 차에서 빠져나와 보험회사에 긴급 사고신고를 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손을 흔들며 우리에게 큰소리치던 그분은 한참 전에 시야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꿈만 같았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옆에 주행하는 차량에 관심을 가지고 쳐다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고, 더구나 바퀴가 펑크 난 것을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더욱 그랬다. 설사 펑크 난 바퀴를 보아도 귀찮아서 그냥 지나쳐버렸다면 어떠했을까?


분명 그는 누군가 보내준 천사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아내와 어린 두 딸과 오손도손 가정을 이루어 가던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한 사건이었다.



하마터면 시험에 떨어져 법조인이 되지 못할 뻔했다


직장이 부도가 나 어쩔 수 없이 퇴직을 한 후 무직 상태로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1차 객관식 시험에는 합격하였지만, 논술식 2차 시험에는 1회 불합격하고 다음 해에 마지막 2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아내와 나는 저녁 식사 후 근처 중학교 운동장으로 산책을 갔다.


조용한 밤이었다. 아내와 손잡고 운동장을 거닐었다. 이때 아내가 나에게 절대자를 진정으로 믿느냐고 물었다.


시험 준비 시작 때부터 아내는 내가 진정으로 절대자를 만나면 합격은 이미 확실하다고 말해 왔다. 아내는 나의 능력과 실력을 기준으로 합격 여부를 예측하지 않았다. 반면에 나는 공부는 내가 하는 것이라며 합격은 열심히 공부해서 되는 것이라고 말해 왔다.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시험을 남겨 놓고 아내의 말에 내 믿음을 생각해 보았다. 나 스스로 합격을 장담할 수 없었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결과를 내가 어떻게 좌우할 수는 없었다. 단지 과정만 열심히 할 뿐이었다. 현재의 나에게는 미래의 결과를 어느 한 방향으로 확정할 힘이 전혀 없었다.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밑바닥으로 내려가자 내가 없어졌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확정할 힘이 없다면 남는 것은 나를 도우시는 절대자를 믿느냐 마느냐의 믿음의 문제였다.


나는 믿기로 결단했다.


드디어 2차 시험일이 다가왔다. 헌법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시험장 근처에 구해 놓은 임시 하숙집을 떠나 시험장으로 가기 1시간 전이었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번 시험에 떨어지면 다시 1차 시험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퇴직한 지 6년째가 되어 나이는 40세가 된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이 있는 상태에서 가족의 생계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심적인 압박감이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래도 잠깐 동안 한 문제 검토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았다. 무엇을 보고 가면 좋을까요?라고 마음속으로 그분께 질문했다.


시험장에 가서 헌법 시험지를 열어 본 순간 깜짝 놀랐다. 50점짜리 큰 문제가 나왔는데 1시간 전에 임시 하숙집에서 마지막으로 검토하며 질문했던 그 문제가 그대로 출제되었다.


일사천리로 논술을 작성했다. 놀랍게도 그해 과락이 많이 나왔던 행정법도 똑같은 경험을 하며 무사히 통과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중에 나보다 실력이 더 좋은 분들이 많다는 사실은 신림동에서 공부하며 익히 알고 있었다. 시험이라는 기준만 통과 못했을 뿐 그분들의 노력과 실력이 나보다 부족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정말 나 스스로의 힘으로 합격한 것이 아님을 절실하게 느꼈다.




지금까지 내 힘으로 살아온다고 했지만 삶이란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뒤돌아보면 나름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지만, 삶의 무대는 혼자 힘으로만 연출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삶의 굽이굽이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알 수 없는 도움으로 삶이 여기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


삶은 나에게 허락된 소중한 선물이다.


앞으로 걸어갈 미래에도 내가 좌우할 수 없는 순간들을 시시때때로 조우할 것이다. 그 순간에도 지금까지 돌보아 준 손길이 계속 함께 하리라고 믿는다. 그 손길이  영원히 계속되고 이에 감사하며 사는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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