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잠시 밖을 나와 관악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내가 합격할 수 있을까?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 것인가?
이 당시 나는 9년 정도를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한 참 고민하며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이었다. 새로운 출발에는 역시 미래에 대한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과 염려도 같이 동반되었다.
마음이 복잡하여 공부하고 있던 과천 도서관 밖으로 나와 외딴 의자에 혼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눈을 들어 관악산 정상을 바라보았다.
내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느 길로 가야 후회가 없을 것인가? 갖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며 떠올랐다. 사실 이런 고민의 시작은 대학생 시절부터 비롯되어 직장 생활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시골에서 서울에 처음 올라와 대학에 입학한 후 1학년은 적응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간지 모르게 보냈다. 2학년 때는 행정고시를 준비해 보려고 했지만 그다지 긴장이 되지 않았다. 공무원이 되어 국가를 위해 무슨 큰일을 해 보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없었다.
3학년이 지나갈 무렵 군 복무가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로 다가와 일단 군대를 마친 후에 고민해보자는 심정으로 4학년 때 군에 입대하였다. 제대 후 3년 만에 다시 대학 4학년에 복학하여 보니 동료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가고 몇 명의 복학생만 남아 있었다.
성적이 좋지 않고 경제 형편도 좋지 않아 대학원 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곧바로 직장을 선택하기로 했다. 직장 종류는 크게 일반 제조업체와 금융권 이렇게 2개 영역으로 나뉘었다.
몇 군데 대기업 제조업체와 종합금융회사를 복수 지원하였는데 다행히 그 당시는 취업이 그렇게 어렵지 않아 몇 개 회사에 복수 합격하였다. 이 중에 모든 금융 업무를 종합적으로 배울 수 있는 종합금융회사를 최종 선택하여 새한종합금융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당시 종합금융회사는 보수가 높고 담당하는 업무도 매우 다양하였다. 여러 금융 업무를 한꺼번에 배울 수 있어서 취업 준비생이 매우 들어가고 싶어 했다.
대학 때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했지만, 막상 직장에 들어가 보니, 담당 업무를 잘 배워야 하고, 승진을 위해 서로 경쟁도 해야 했다. 조직 생활에서 인정받기 위해 직장 동료나 상사들과 잘 어울려야 하는 부담감을 안기도 하며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당시 직장에서 크게 성공할 가능성이 많지 않았다. 성격상 경쟁심이 별로 없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거나 비위를 맞추며 장단을 맞출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했다. 물론 맡은 일은 열심히 했지만 사실 나는 직장에서의 성공보다는 나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더 중요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나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굳이 직장 상사의 인정과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회사에서 주는 월급은 매우 많았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 당시에 거의 최고 수준이었을 것이다. 돈을 많이 주는 회사에 근무하는 나는 아무런 불평이나 불만도 없었고 만족감이 넘쳐났다. 사원으로 입사해 대리로 진급하고, 이제 대리 직급도 거의 끝 단계에 도달하여 과장직으로 승진하는 것이 거의 확실했다. 실제로 나중에 인사팀으로부터 과장으로 승진시켜 주겠다는 통지를 받았다.
9년 동안 내가 목표했던 금융업무 전반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여신, 수신, 회계, 세무, 증권 업무 등 종합금융 업무에 대한 경험을 나름대로 쌓아가고 있었다.
도서관 밖에서 앉아 있는 벤치 옆에 푸른 잔디밭이 보였다. 거기에 예쁜 꽃들이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각기 아름다운 제멋을 내며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조용히 자라는 것이었다. 벤치 주변에는 사람들이 오가며 평화로운 산책을 하고 있었다.
삶이 이렇게 물 흐르듯 평화롭게 흘러가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삶이란 역시 나의 기대와 예상 그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삶에는 변수가 있기 마련이지만 1997년 말에 일어난 IMF 사건은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국민이 전혀 예기하지 못한 외생변수였다.
이때부터 나의 앞길은 완전히 뒤바뀔 수밖에 없었다. 다니던 직장이 부실기업으로 바뀌어 사실상 부도상태가 되었다. 직장을 토대로 삼아 오랫동안 금융업무도 배우고 승진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삶의 기본 전제가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다른 직장으로 옮길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미련 없이 명예퇴직하였다.
아내는 아무 꿈 없이 그냥 직장 생활하는 내 모습에 대해 답답함을 가지고 있었던 차였다. 아내는 이제 직장도 무너졌으니 나만의 꿈을 가지고 무엇이라도 한번 시도하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아내는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고민을 했다. 전문적인 지식을 배워 전문가로 생활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늦은 나이까지 오랫동안 일 할 수 있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되어 보자”
이 당시 나는 아무런 겁이 없었다.
어차피 회사도 망한 바에야 다시 제로 베이스에서 새 출발하는 입장이다 보니 시간 따위의 문제는 나에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의사가 되어 늦은 나이까지 일하면 그런 시간들은 충분히 커버가 될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의대를 가려면 당연히 수능시험은 이과를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고등학교 때 문과를 졸업했으니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수학, 과학 공부를 다시 하는 것이었다. 일단 “수학 정석” 참고서를 구입하여 이과 수학의 기초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집 근처에 있는 과천 시립 도서관에 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를 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졸음이 와 앉은 자세로 고개만 떨구고 잠깐 잠을 잤는데, 잠에서 깨어나 보니 아래 어금니 하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불안감이 있었는지 무의식 중에 어금니 하나를 꽉 물고 잠을 잤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그 어금니는 제대로 기능을 못하여 그쪽으로는 고기나 딱딱한 음식은 전혀 씹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기능이 상실된 어금니는 IMF로 인한 심적인 압박감이 내 몸에 표출된 상징물과도 같았다.
그러던 중에 의대는 딸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아 당장 시험을 볼 수 있는 변리사로 방향을 틀었다.
아내는 내가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도시락을 준비하여 도서관까지 가지고 왔다. 아내와 함께 두 딸도 도서관에 같이 왔다. 아내가 맛있게 싸준 도시락을 먹고 난 후, 두 딸과 도서관 주변에서 공놀이도 하고 산책도 했다.
어느 날 고등학교 친구 철을 만나게 되었다. 철은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한 나의 친한 친구였다. 신림동 식당에서 같이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나중에 변리사가 될 계획이라고 말하자, 이왕이면 변호사가 더 낫지 않겠느냐고 조언을 해 주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변리사 자격증은 자동으로 나오니 변호사가 되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변리사보다는 곧장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제 과천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책이 수학 정석에서 민법총칙으로 바뀌었다. 친구 철이 민법을 제대로 기초부터 튼튼히 공부하는 것이 사법시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해 주었기 때문에 민법을 기본부터 착실하게 공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공부하는 자체가 나에게는 참 좋았다. 직장에 다닐 때는 크게 작동하는 시스템이 있고, 나는 그 시스템에 속한 부속품의 하나처럼 느껴졌었다. 내가 하는 일은 매일 쳇바퀴 돌 듯 반복적이거나 기계적이기도 했다. 직장에서는 내가 주체라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법을 공부하면서는 내가 주체가 되어 법의 기본 원리를 사색하고 문제점을 요모조모로 따져 볼 수 있어 생동감이 있었다.
법학은 대학에서 전공한 경제학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경제학은 매우 잘 짜인 경제이론이 있고, 그 이론은 저명한 경제학자가 깊이 있게 연구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 경제이론은 그 학자의 것이지 나의 것이 전혀 아니었고, 그 이론으로 내가 현실에서 무엇인가를 어떻게 해 나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법학은 당장 내가 직면하고 있는 생활의 문제를 직접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를 알려주어 단순한 이론에만 그치지 않았다. 내가 직접 주체가 되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배우는 것이었다. 공부가 재미있었다. 민법을 차분히 기초부터 다지기 위해 매우 노력했다. 기초적인 사항을 그냥 넘기지 않고 항상 왜 그럴까라는 의문을 가지며 문제가 이해될 때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공부를 한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벤치에 앉아 고개를 들어 바라본 관악산 정상은 매우 높아 보였다. 산 정상은 매우 가파른 암석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장기간 공부하였는데 합격하지 못하면 우리 가족의 생활은 어떻게 될까? 공부를 한다고 하여 반드시 합격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과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별개 문제였다. 많은 사법시험 준비생들이 시험에 떨어져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나도 그런 사람처럼 되지는 않을까?
내가 아내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반드시 합격할 것입니다”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결과는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현재는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내 앞날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처음 누가 이 가파르고 높은 산을 만들었을까? 과연 나의 도움은 어디에서 올 것인가?
일단 열심히 공부를 해 보자.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자.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다시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1998년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민법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내가 소유하며 거주하고 있던 주택에 세 들어 살던 임차인의 방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누수 사건이 발생하였다. 누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임차인과 문제가 생겼고, 임차인이 상당히 강폭 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미련 없이 주택을 팔고 신림동 고시촌으로 이사하여 본격적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신림동에서 독서실을 정하여 집중적으로 법 공부를 시작하였다.
2000년에 1차 시험에 처음 응시하여 평균 2점이 부족하여 떨어졌다. 2001년에는 불과 한 문제 차이로 1차 시험에 아쉽게 떨어졌다. 직장을 그만 둔지가 3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생활할 돈도 떨어지고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2002년에 1차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그 해 2차 시험에는 떨어졌다. 이듬해에 최종 합격했다.
이렇게 나의 진로는 직장인에서 변호사의 길로 바뀌었다. 변호사가 되면 모든 것이 장미빛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변호사라고 하여 우리들의 삶에 다가오는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한 이치였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
뜻하지 않은 IMF를 만나 직장이 부도나고 어디로 갈 바를 몰라 헤매다 우여곡절 끝에 사법시험을 준비했었다. 정확하게 10년 후인 2008년에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Global 금융위기가 우리나라에 닥쳐와 경제가 다시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19년 말에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Corona 바이러스 사태가 우리 모두를 강타했다. 이처럼 알 수 없는 미래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외생변수로 다가온다.
우리나라 경제도 많이 노후화되어 성장 동력을 상실하여 젊은이들이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 되었다. 어려운 이 시기를 관통하여 살고 있는 청년 세대들은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어려운 과거를 지내온 부모 세대도 정답을 모르기는 매 한 가지다. 확실한 것은 청년세대는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자원을 스스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자의 색을 아름답게 칠할 수 있는 미래라는 시간이 있다. 조용히 돌아와 자신과 대면하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희망의 길이 보일 것이다.
실패는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다. 꿈의 성취 여부는 사람마다 각기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꿈을 품고 끊임없이 성실하게 노력하고 도전한다면 설사 실패를 하더라도 자신의 삶에 보람을 느끼고 만족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