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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일 May 14. 2019

미디어가 되어라. be the media.

<볼륨을 높여라>를 보며 1인 미디어 크리에이터를 떠올렸다

  크리스찬 슬레이터의 1990년 주연작 <볼륨을 높여라>를 봤다. 초등학교(사실 국민학...) 다닐 적에 개봉했던 영화라서 개봉 당시엔 보기 어려웠겠지만 아마 알았어도 안 봤을 거다. <스타워즈>, <구니스>, <백 투 더 퓨처>는 즐겼지만 부조리한 학교 생활과 체제의 억압, 그리고 그에 맞선 청소년들의 반항과 혁명을 이해하는 건 초등학생인 나에겐 어려웠을 테니까. 뒤늦게 보며 두 가지에 감탄했다. 1. 크리스찬 슬레이터는 참 꽃미남이었구나. 2. 한창 풍요롭던 레이건 시대의 미국에서도 젊은이들은 억눌리고 짓눌려 숨도 쉴 수 없었구나. 적어도 개봉 당시엔 이 영화가 대리만족은 시켜줬을 것 같다. 어떻게? 그건 보면 안다.


등사기와 아마추어 무선 HAM 

  요즘 유튜브를 기반으로 시민 개개인이 발언하고 소통하는 게 대단한 일인 것 같지만 예전에도 이런 움직임은 은근히 그리고 활발하게 이어져왔다.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등사기로 찍어낸 유인물을 뿌렸고, 아마추어 무선 동호인들이 가정에 설치한 무전기로 인근 지역이나 전 세계를 대상으로 개인 방송 전파를 송출했다. 자기 생각을 말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사람들을 이어주는 게 미디어의 본질이라면 시대 분위기 때문에 주제가 제한적이고 도달 범위가 한정적이란 점을 제외하면 이미 수십 년 전부터 '1인 미디어'는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글을 쓰고 무전기를 잡는 모든 개인이 미디어 활동을 하는 것이니까. 9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서도 확산된 BBS(Bulletin Board System)까지 포함한다면 월드와이드웹(WWW)이나 블로그, 윈앰프, 팟캐스트, UCC, 유튜브가 대중화되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은 거대 방송국과 미디어 전문가들이 아닌 '1인 미디어'가 만들어낸 콘텐츠를 소비하고 그중 일부는 제작까지 하고 있었던 셈이다. 


소셜 미디어의 역사. 당신이 가장 먼저 접한 서비스는 무엇인가. (제작 : Miriam J Johnson)

미디어와 표현의 자유

  이 영화는 표현의 자유와 미디어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영화다. 누군가 발화(発話)의 주체가 되는 건 쉽다. 적당한 이야기와 적당한 표현 방법(매체)만 있으면 된다.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하고 싶은 말을 내뱉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런데 세상은 얄궂게도 자유롭게 말하려는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기성세대와 체제는 윤리적 잣대와 법률을 들이대며 통제하려고 한다. 조금만 유명해지면 그 영향력을 빌려 이익을 취하려고 광고와 협찬이란 이름으로 줄을 선다. 그 과정에서 자기 검열을 하고 돈을 좇다가 자기 목소리를 잃고 마는 미디어의 사례는 수없이 목격할 수 있었다. 동서고금, 목소리를 가진 자를 두려워하거나 이용하고 싶은 세력들은 언제나 존재해왔으니까.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당당한 독립 미디어? 아직까지는 그리 많아 보이진 않는다.

  영화 속에서 DJ 해리는 처음엔 자기 과시와 일탈을 위해 해적방송을 시작한다. 타지로 이사 와서 친구도 없고 또래든 교사든 잘난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유일한 탈출구로 마이크를 잡은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떠들고, 남들이 모르는 음악을 소개하고, 고민이 많아 사연을 보낸 누군가에게 무책임한 상담까지 해준다. 소심하고 음침한 고등학생 마크의 아바타 DJ 해리가 만든 1인 방송은 오락거리를 넘어 지역사회 전체를 뒤숭숭하게 만든다.

  팬이 늘고 영향력이 커진 해리는 발언의 수위를 높인다. 학교와 어른들을 비판하고 또래 청소년들에게 고분고분하게 살지 말라고 부추긴다. 어찌 보면 뻔한 설교지만 자신이 고등학생이란 걸 밝히며 솔직하게 다가가자 영웅과 분출구가 필요했던 청소년들은 그의 말을 그 어떤 진리보다 위대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물론 부모와 교사들의 분노도 그만큼 폭발한다.

  결론은 뻔하다. 결국 잡힌다. 어떤 위기를 만나선 방송 중단을 선언하고, 어떤 위기에선 기지를 발휘해 위험을 벗어나지만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걸 깨닫고 난 뒤엔 도망치는 걸 멈추고 장렬하게 체포된다. "볼륨을 높여라"라고 말하며. 그리고 이어지는 엔딩 장면. 각 지역에서 저마다 방송을 시작하는 제2의 해리들, 아니, 제1의 목소리'들'이 울려 퍼지며 영화가 끝난다. 비록 주인공의 여정은 끝나지만 표현의 자유는 그렇게 쉽게 짓밟을 수 없다는 영화의 주제를 아주 단순하게 보여준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책상 위 '오 캡틴 마이 캡틴' 장면이나 <더 포스트>의 신문 1면 나열 장면, <변호인>의 변호사 호명 장면 못지않은 가슴 찡한 장면이다.


영화 속 DJ 해리의 해적 방송은 가정이 꽤 부유해야 가능했지만, 요즘의 1인 미디어는 스마트폰 한 대면 시작할 수 있다.

펜을 잡든 마이크를 잡든 카메라를 잡든, 1인 미디어가 되어라

  요즘 1인 미디어 강의를 다니고 있다. 수익을 위한 최저 기준인 1000명의 구독자도 모으지 못한 유튜버 주제에 기존 유튜버와는 다른 1인 미디어 크리에이터가 되라고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고 열심히 떠들고 있다. 앞으로 수업을 할 때는 이 영화를 한 번쯤은 언급할 것 같다. 무엇을 말하고 누구에게 말할지 고민할 때도 도움이 될 거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전략을 세울 때도 도움이 될 거다. 인플루언서가 되는 짜릿함을 간접 체험할 수도 있고, 표현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감을 느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청춘영화겠지만, 마이크를 잡고 카메라를 들려는 초보 제작자에겐 그 어떤 강의나 교재보다 더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주제는 시청자의 필요성 내지는 중요성이다. DJ 해리가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다루고 시원하게 떠들었어도 시청자들의 반응이 없었다면 일기 쓰기와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자기만족, 자기 위로 그 이상은 될 수 없다. 당연히 오래 지속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미디어는 화자와 청자 모두 있어야 한다. 둘은 연결된 채로 끊임없는 상호작용해야 한다. 극 중에서 해리가 청취자들의 사연을 읽으며 심경에 변화를 일으키고 현실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활동 방향을 수정하는 것처럼 '미디어'로 존재하고 활동하려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반응과 세상의 흐름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숨 쉬어야 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게 진정한 미디어의 목표이자 현대 시민의 책무가 아닐까?


이 단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냥 be the media로 검색하니 나온 그림 중 가장 강렬해서. (출처: bethemedia.com)


클로징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열변을 토할 땐 시드니 루멧 감독의 <네트워크>에서 진행자가 일장 연설을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미디어의 마력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매력적인 목소리로 멘트를 날리는 영화 속 주인공을 보며 DJ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도 많았을 것 같다. 아마 요즘 젊은이들은 <더 포스트>나 <스포트라이트>, 미드 [뉴스룸]을 보며 언론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겠지. 부디 앞으로도 미디어를 주제나 소재로 다룬 작품이 많이 나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자극을 주길 바란다.

  p.s. <나이트 크롤러>나 <투 다이 포>도 반면교사로는 아주 훌륭하다는 걸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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