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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일 Jun 03. 2020

다큐멘터리 <철규> 리뷰

인디다큐페스티벌2020 프로그램 노트

“턱이 있네. 턱이 없는 데가 없어” 


  이 영화는 수많은 문턱에 대한 이야기다. 뇌병변 장애를 갖고 있는 인권활동가 선철규씨가 소원이었던 제주도를 가는 여정, 가서 겪는 여러 가지 체험, 과거에 만들었던 다큐멘터리 <지렁이 꿈틀> 클립들, 만났던 사람들의 인터뷰가 골고루 담겨 있지만 결국은 대한민국 곳곳에 놓여 있는 문턱에 대한 이야기다. 한 발짝만 떼면 쉽게 넘어갈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산맥처럼 가로막아 문턱 너머의 수많은 기회를 포기해야 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활동지원사가 없으면 제 몸 하나 가누기 어려운 중증 장애인은 ‘시설’에 머문다면 별다른 문제없이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할 순 있다. 하지만 그들을 각종 편의시설과 도와줄 사람들 사이에 가둬 놓는 이유가 장애인들을 위한 게 아니라면? 올림픽을 앞두고 산동네와 판자촌을 가리기 위해 대로변에 화려한 장벽을 세우거나 아예 마을을 불도저로 밀어버린 1988년의 서울과 2008년의 베이징처럼 장애인들을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치워버리려는 불순한 의도가 개입된 건 아닐까. 굳이 시설 밖으로 나와서 고생하지 말라고 가볍게 던지는 충고나 불평 속에는 ‘우리’의 ‘정상’적인 삶을 방해하지 말고 ‘너희’끼리 조용히 살라는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의도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아니, 그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도 못하고 누군가와 교류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삶을 삶이라고 부를 순 있는 걸까.


  주인공 철규씨는 용기를 발휘한다. 모두가 반대할 때 과감하게 시설을 뛰쳐나왔던 것처럼 끊임없이 제주도 여행이 꿈이라고 말하고, SNS로 소문을 낸다. 도와줄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 마련한 리프트카를 타고 여객선에 오른다. 섬에 들어간 뒤 바닷가를 따라 걷(듯이 휠체어 바퀴를 굴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난생 처음으로 바다에 몸을 담근다. 비장애인들에겐 일상인 일들을 수많은 이들의 지원과 일상적이지 않은 각오로 무장한 후에야 겨우 해낸다. 버킷 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긴 시간을 기다렸고 배에서 내리며 “드디어 자유다”라고 외쳤지만 제주도 여행 중에 만난 또 다른 문턱 앞에서 선철규씨는 어떤 생각을 했고 집에 돌아간 후 어떤 기록을 남길까. 이 영화는 5일간의 짧은 여행을 다루지만 그의 생애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를 담담하게, 그러나 압축적이고 효과적으로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철규씨의 눈높이에서 바라 본 마지막 시퀀스는 압권이다.


  <철규>는 중력 때문에 힘들어하는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부력이 되어준다. 태생부터 비장애인과는 다른 무게를 짊어지고 편견과 오해를 감당하며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구명조끼가 되어 바다에 뛰어들 수 있게 도와준다. 또 장애인의 삶을 몰랐거나 애써 외면했던 이들에게 경사로가 되어 장애인의 삶에 다가가게 만들어준다. 그들이 원하는 건 특별한 배려나 지원이 아니라 해넘이 구경이나 노래방 이용 같은 평범한 일상이고, 그들도 좋은 사람을 만나면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싶은 똑같은 인간이라고. <철규>는 그런 사소함으로 모두의 마음을 꿈틀거리게 만드는 거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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