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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esta May 25. 2020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낭만은 이루어질 수 없을 때 낭만으로 남는다




 우리게 파리는 낭만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이다. 역사를 거치며 쌓아 온 파리의 이야기들, 지금은 기억으로 남은 화려한 궁정 생활과 혁명의 열기, 감각적 예술이 한데 어우러져 파리의 공기에 녹아들어 있을 것만 같다. 행자들에게, 예술가들에게, 혹은 파리의 역사를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파리는 일생에 꼭 한 번은 발자취를 남겨야 하는 성지 같은 장소이다.


 가곡과 함께한 아름다운 색감의 오프닝, 파리의 과거와 그 시대를 산 위인들이 줄줄이 나오는 이 영화는 파리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담아낸 자기만의 황금시대에 대한 동경은 파리에 아무 감흥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닐까. 현재 우리가 속한 땅에서 공감받지 못하는 나만의 개성이 특정 시대 특정 공간에서 마음껏 펼쳐질 수 있다는 상상. 가능성이 없음에도 우리를 조금은 위로해 주며, 우리의 가슴에 작은 낭만을 심어 준다.


 화의 주인공 길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이지만 문학적 성취를 꿈꾸는 낭만주의자이다.  그에게 문학과 예술의 전성기였던 1920년대 파리는 곧 황금시대를 의미한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약혼녀 이네즈와 함께 파리를 방문고, 도시가 풍기는 분위기에 매료다. 하지만 그의 약혼녀는 그의 감상을 가볍게 여기며, 그저 도시를 누리고 싶어 하는 길과 달리 지인들과 사교 활동과 세련된 관광만이 그녀의 관심사이다.  


 둘은 점심 식사 중 우연히 만난 이네즈의 옛 친구 폴과 함께 동행하게 되는데, 소르본 초청 강연자인 폴의 현학적 태도는 길의 비위를 거스르고, 결국 댄스파티에 가자는 폴의 제안에 길은 일행을 빠져나와 숙소로 걸어간다. 에서 잠깐 멈춘 사이 열두 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신형 세단들이 줄지어 가던 거리에 구형 푸조 한 대가 모습을 드러내고, 차 안의 사람들이 길을 초대한다. 1920년의 파리가 그를 직접 초대한다.


 이끌려 간 곳에서는 콜 포터의 사랑 노래가 흘러나오고, 젠틀한 복장의 남녀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년대의 사교 클럽 같은 공간인데, 나중에는 작가 장 콕토를 위해 마련된 파티라는 게 밝혀진다. 이곳에서 피츠제럴드 부부를 만나고 나서야 길은 황에 대한 을 잡게 된다. 이후 헤밍웨이도 만나고,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원고 검토 제안도 받으며 믿기지 않는 하룻밤을 보낸다.


 사건 이후 영화는 현실에서 이네즈와의 불협화음과 한밤중의 로맨틱한 파리 두 갈래 이야기로 나뉘게 된다. 길의 취향에 여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이네즈와의 낮 생활과, 옛 파리에서 과거의 거장들과 함께하는 생활. 이곳에서 길은 자신과 취향이 비슷한 아리아드네라는 여자와 나, 잘 맞지 않는 약혼녀와의 생활 대신 아리아드네와의 사랑을 키워 가는 데 신경 쓰게 된다.


 하지만 길이 20년대 파리를 황금시대라고 생각했듯이, 아리아드네에게 황금시대는 1890년대, 벨 에포크 라 불리는 시대이다. 파리는 아리아드네와 길의 소원을 한번 더 들어주어 19세기식 마차가 그들 앞에 서고, 그들은 고흐와 고갱 같은 그 시대의 예술가들을 만나지만 그들 역시 르네상스 시대를 황금기라고 생각한다.


 현학적인 폴은 영화 초반부에 과거에 대한 향수는 곧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 있는데, 그때 그를 재수 없다 여겼던 길은 그가 동경했던 시대의 아리아드네, 그녀가 동경했던 벨 에포크 시대, 그리고 르네상스를 동경하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보며 현재란 늘 불만족스러운 것임을 깨닫게 된다. 마음속에 품은 향수는 낭만이지만, 이를 현실로 옮기려 하는 시도는 환상을 깨트릴 뿐이다.


 영화에는 세 여자가 등장한다. 세속적인 가치에만 관심을 두는 이네즈, 과거에 대한 낭만을 품었다는 점에서 길과 통하는 과거 시대의 아리아드네, 현재에 살며 콜 포터의 노래와, 비 오는 날 파리를 좋아하는 가브리엘. 길이 삶과 사랑을 대하는 태도가 변함에 따라 와 함께하는 여자도 변해간다.


 영화를 보며, 여자 복 많은 길의 연애담들은 사랑보다는 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진 은유로 느껴진다. 처음 그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 채 비현실적 낭만을 꿈꾸는, 순진한 회의주의자였다. 하지만 현실과 타협 속에서 그는 세속적인 성공이라는 타이틀과, 그 타이틀을 좋아하는 여자를 만난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제반에 깔린 꿈에 공감을 못 해주는 사회와 연인 사이에서, 낭만과 현실은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그러던 그에게 낭만이 현실로 닥치고, 아리아드네라는 꼭 맞는 여인을 만나지만, 길은 역설적으로 그녀에게서 자신의 단점을 찾아낸다. 그녀 역시 그녀의 낭만이 현실이 되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1890년대의 아리아드네와 1920년대 파리의 자신이 느낄, 황금시대 속에서 누리는 영원한 행복이 결국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낭만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도, 사람은 결코 실현된 자신의 소망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낭만을 쫓으며 현재를 회의하던 길과 아리아드네, 낭만을 무시하며 세속적 가치에만 관심을 두는 이네즈. 어느 쪽도 꿈을 대하는 건강한 태도는 아니겠지만, 레코드 가게의 가브리엘은 그에게 대안을 제시한다. 어떤 시대나 장소, 비 오는 날 파리 같은 소소한 취향을 공유하고, 낭만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같이 꿈꿀 수 있는 연인, 시간을 관통한 지혜를 얻어 온 길은 결국 가브리엘을 선택한다.


 자기만의 꿈에 빠져 현재를 무시하는 맹목적 태도는, 결국 눈 가리고 아웅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메세지이지만, 유일한 메세지는 아닌 것 같다. 길이 선택한 건 이상의 포기가 아니라 이상과 현실의 조화이기 때문에, 건조한 현실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삶에 낭만 한 스푼을 더하는 것이 처방이 될 것이다.


 고로 이 영화의 교훈은 얻어 가되, 감독이 낭만을 그려내는 방식에도 주목해 주어야 영화를 제대로 보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프닝에서 따듯한 색감으로 도시 구석구석을 훑고, 다양한 시대에서 파리의 절제된 모습들을 보여 주며, 시대를 건너뛰는 음악과 예술로도 우리의 감성을 적실 수 있다.


 또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예술가들이 등장하는 것 역시 놓칠 수 없는 재미 중 하나이고, 실제 캐스팅이 실존인물과 꽤 비슷하게 짜였다. 위대한 예술가들과 그들의 도시를 성의껏 그려냈다는 사실이, 파리의 낭만에 너무 빠지지 말라는 메세지를 담았던 것 치고 역설적으로 이 영화를 파리에 대한 찬양시로도 만들어 준다. 분명 파리는 멋진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도시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파리의 공간과 시간을 아름답게 담아낸 사랑스러운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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