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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esta Jan 31. 2020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사랑과 순수함이 빚어낸 쌉싸름한 아이러니





  첫사랑, 남자에게 이 정도 의미를 갖는 단어가 얼마나 될까? 첫 번째 여자 달콤함에 삶을 바치는 흔한 남자 인생의 클리셰는,  후 독일에서도 예외 없이 일어난다.


  1958년 서독의 작은 마을, 서투른 사춘기 소년 마이클은 서른 중반의 여인 한나의 유혹에 빠지고 만다. 그는 녀 덕에 여자를 알아가고, 그녀의 한 마디에 자신감을 얻기도 하지만, 릴 때부터 실하게 지켰던 가정의 룰을 무시하기도 하고, 친구들과의 생일 파티를 내치기도 한다. 그녀 위주로 삶을 꾸려가며 사랑을 키워가던 어느 날, 가족과 친구를 대신해 선택한 첫사랑은 갑자기, 말없이 행적을 감춘다.


  8년의 시간이 흘러, 이클은 대생이 되었다. 그는 정의와 규범을 배우고 익히며, 더 깊은 공부를 위해 세미나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세미나 수업의 일환으로 방문한 법정에서 그의 귀에 놀라운 이름이 들려온다. 한나 슈미츠,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이름이지만,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왜냐면 그가 그녀를 만난 곳은 전범 재판소였고, 그녀의 이름은, 전쟁 범죄자를 심판하는 판사가 부르는 피고의 이름이었다.


 법조인에게 전범 재판이 어떤 것인지는, 같은 법학 세미나 학생 디터에게서 들을 수 있다. 그는 피고를 혐오하며, 정의 때문에 이 재판이 흥미롭다고 하였다. 그에게 재판은 도덕의 잣대에 입각한 정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같은 법대생인 마이클의 입장에서 피고인 그녀는 순수하고 무결한 첫사랑의 추억이기도 했다. 공부하며 배웠던 도덕에 비추면 그녀는 범죄자이고 도살자이지만, 그만의 경험과 기억이 그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냉철한 법조인이냐 서툰 정열을 가진 한 남자이냐? 이성의 말과 감정의 울림 중 무엇을 따를 것인가? 그에게 갑자기 닥친 아이러니는 이 영화의 정수이자 시작이다.


  영화의 아이러니는 하나뿐이 아니다. 지성의 상징인 책과 뒤엉킨 욕망과, 백치로 보일 만큼의 순진함이 영악함으로 읽혀 받은 무기징역, 완고한 순수함이 희생시킨 수백의 생명. 이 영화는 아이러니에 휩쓸려 다닌다. 마치 영화 안에 반복해 등장하는 「오디세이」의 주인공처럼. 그는 신의 노여움을 사 보름 거리 바닷길을 십 년간 표류하는데, 이는 출항 전부터 신탁에 예견된 내용이었다. 오디세이의 메세지를 운명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이라고 해석하면, 한나는 오디세우스와 운명의 풍파를 같이한다. 한나는 충분히 교육받지 못했고, 그걸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강했다. 그래서 자존심을 붙잡고 아이러니의 바다를 표류한 끝에, 순수했던 그녀는 어린아이를 학살한 무자비한 전쟁 범죄자가 되어 있었다.


  순수하고 고집 센 여자와 전쟁 범죄자가 조화되지 않는가? 여기서, 전쟁 범죄자가 순수한 사람이라는 모순실제 유명한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나치 시절 유대인 학살의 총책임자로 일했던 아돌프 아이히만, 그는 예루살렘의 전범 재판장에서 열린 심문에 당당히 자신은 상부의 명령대로 따랐을 뿐이니 죄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맡은 마 책임을 성실히 완수하는 사람비난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으 성실함의 걸과는 수백만 유대인의 처형이었다. 이 재판을 지켜보던 어느 학자는 한 가지 의문을 품는다. 다들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평범하게 여기는 일이 악행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의문을 품은 학자의 이름은 '한나' 아렌트. 그녀는 이 사건을 가지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평범히 행하는 일이 악행일 수 있고, 우리가 속한 시스템에 대한 숙고 없이 행하는 행동이 잘못되었을 수 있다는 주장. 실제로 아이히만은 나치 체제 하 존경받는 사회인이자 매너 있는 시민으로 평가받았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맞다. 이 영화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이 아이러니함이다. 우리 주변의 티켓 판매원 같이 흔한 인물이 학살자였을 수 있다. 혹은 파렴치한 전범이 사실은 순수하고 여린 사람이었을 수 있다. 글도 못 읽을 만큼 배움과 생각이 얕다는 이유로 사람은 악마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주된 메세지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과 유사. 척 보기에 사악해 보이는 사람만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당신 주위의  인자하고 따스한 이웃, 혹은 당신 스스로가 자기도 모르는 새 파렴치한 행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보이는 것만을 보지 말자. 항상 긴장하고, 사유하고, 비판하며,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


  일의 의미 깊은 자기반성은 중요하다. 전쟁 범죄에 대한 자아성찰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메세지가 영화의 모든 것은 아니다.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을 주제로 삼은 영화는 많다. <인생은 아름다워>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등등. 그중에서도 이 영화에 담긴 메세지는 의미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영화의 정체성을 세계대전 영화라고 못 박기엔, 중요한 포인트가 빠져 있다. 이 영화는 두 개의 기둥이 지탱하는 영화이다. 한나 아렌트의 메세지를 담은 한나는 아이러니와 불안정성에 휩쓸려가며 이야기의 뼈대를 만들지만, 그 뒤에선 도덕적 잣대를 고뇌하면서도 듬직히 그녀의 뒤를 받혀주는 마이클의 사랑이 살을 채워 넣는다.


  이 영화는 마이클의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회상의 시절은 크게 세 가지, 소년기의 마이클과 대학생 마이클, 이혼 직후의 마이클이다. 첫 번째 소년 시절에서, 마이클은 한나의 유혹에 빠지고 그녀와 사랑을 키워 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때 한나의 감정은 마이클이 아닌 자신을 향해 있다. 자신에게 빠진 사춘기 소년에게 상처 받을 말을 뱉고, 생일은 신경 쓰지도 않으며, 문맹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를  내팽개치고 잠적해 버린다. 자존심과 사랑은 공존하기 힘들고, 한나의 굳센 자존심은 그녀의 마음이 사랑에 자리를 내어주지 못하게 막는다. 서로 몸을 섞는 관계임을 제외하면 첫 번째 기억은 연애담이 아닌, 그저 사랑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에 가깝다.


  두 번째 회상에서는 마이클이 재판을 보며 겪는 고뇌가 담긴다. 따듯하고 매혹적이던 기억 속 그녀와 유대인 어린아이를 학살한 현실의 그녀 사이. 마이클은 조화할 수 없는 두 이미지 사이에서 고민하다, 재판의 막바지에서 그녀가 문맹임을 알아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고, 그로 인해 누명을 뒤집어쓰지만 끝까지 자존심을 지킨다. 마이클은 누명을 해결해 주는 대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리고, 그녀가 문맹이라는 점에서 그는 그가 처한 괴로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희망을 보게 된다.


  그녀는 사실 글을 몰라서, 배우지 못해서,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런 일을 저질렀을 뿐이다. 마지막 회상에서 그가 그녀에게 읽어 주는 책들은 그녀에게 선물한 지성이자, 남이 읽어주는 책을 좋아했던 그녀의 자존심에 건네는 응원이다. 그런데 이때 마이클이 책을 읽어주도록 한 것은 그의 사랑이었을까? 내 생각에는, 그의 열정은 어릴 적 사랑이 전부였다. 성인 이후 그녀를 판단하는 데 이성적 잣대가 개입하는데, 이성적 판단과 열정은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러나 그녀를 향한 사랑이 식어도 그 기억은 마이클의 삶에 강렬한 흔적을 남겼다.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은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존중이자, 그녀와 사랑을 나누기 전 치렀던 추억 속 의식을 불러오는 일이다.

 

  마르테와 성애를 치르고도 동침하지 않는 냉함, 현재의 불안한 여자 관계, 딸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수 없었다는 고백 등은 마이클이 한나에게 받은 기억과 상처가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고로 내게 마이클의 열정적인 낭독은 첫사랑을 보내기 위한 그만의 방식으로 읽혔다. 그러나 반성 없는 한나의 태도는 그의 정성이 먹히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이에 대한 마이클의 실망은 한나에겐 자존심을 받혀줄 유일한 기둥의 붕괴였다.


 순수했던 악인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그녀의 죄는 용서받지 못하지만 이해받는 것으로, 여자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배신당한 남자는 상처를 이기고, 딸에게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음을 여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다루는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영화 전반을 절제된 차분함이 지배하고 있기에, 적절한 분위기가 아니라면 영화의 메세지가 제대로 전달되기 힘들 수 있다.


 그러니 마음을 잡고 화면 앞에 앉아, 그들의 감정과 공명하며 영화를 보기를 권장한다. 마이클의 일상이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아 그가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로맨스는 가정과 연인을 뒷전으로 하고 사랑에 휩쓸린 남자, 순진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악마로 몰린 여자가 주인공이다. 두 사람의 애처로운 의존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의 관계마저 사회의 기준에 들기 힘든 것이라 위태로워 보이는데, 나에게 둘의 위태로운 모습이 시대의 상흔을 전달해 주었다. 전쟁과 분단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나라가 만들어낸, 그들의 상처를 반추하는 품격 있는 영화였다.


 


# 아이히만의 재판은 준비된 변론이었고, 그는 죽을 때까지 죄를 알면서 뉘우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논고 역시 역사학계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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