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書評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 국내에서는 "상실의 시대"로 괴장히 유명한 소설이다. 대학교 1학년 떄 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에 푹 빠지게된 계기가 되었다. 소설 속 묘사가 굉장히 디테일하면서 마치 내가 소설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 게 하루키 문학의 색채라고 할 수 있다. 일상에서 비롯되어 전개되는 난해한 이야기 구성이 더욱 소설에 몰입감을 준다. 소설을 읽으면 마치 현실을 잠시 잊고 소설 속에 잠시 머무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군대에서 하루키 책들을 많이 읽었다. 해변의 카프카, 기사단장 죽이기, 색채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 스푸트니크의 연인, 태엽 감는 새 등등. 그리고 "상실의 시대"도 다시 읽었다. 독서를 하면서 단조로운 일상과 갖가지 잡념에서 벗어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 당시 부대 내에서 열린 서평 대회에 "상실의 시대" 작품으로 참가했는데 그 때 작성했던 서평을 공개하려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많이 읽었던 소설이 있다. 소설 속 소년은 청년이 되었고 청년은 중년이 되었다. 그를 둘러싼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그 가운데 비행기에서 잠이 깬 중년은 잠시 想念(상념)에 잠겨 상실을 경험했던 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의 인생 한 편을 살아오던 친구를 자살로 떠나보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자신이 짝사랑했던, 자살로 생을 마감한 친구의 여자 또한 자살로 떠나보낸 뒤, 청년은 세상의 중심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다급하게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알고 있다면 이미 눈치 챘을 내용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이라는 소설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인 와타나베와 고등학교 시절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기즈키,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 나오코는 늘 셋이 함께 다니곤 했다. 그러던 중 셋의 중심이었던 기즈키가 이유모를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와타나베는 그 이후 도망치듯 도쿄의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도쿄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와타나베는 우연히 지하철에서 나오코를 만나게 되고 나오
코에 대한 사랑인지 연민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나오코는 기즈키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였고 결국 그녀는 치료를 위해 와타나베와 연락을 끊고 요양원에 들어간다. 나오코가 뒤늦게 보낸 편지로 그녀가 “아미사”라는 요양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와타나베는 그녀를 찾아가 묻어 두었던 기즈키와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이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한 편 같은 대학에서 만난 미도리는 기즈키의 죽음 이후 모두와 벽을 치고 지내던 와타나베의 삶 속에 뛰어 들어와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생기 넘치고 당당한 미도리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뛰어들던 와타나베는 그녀의 환한 모습 이면에 있는 아픔을 알게 되고 연민을 느끼며 점점더 미도리와 깊은 관계가 되어간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나오코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이야기하는 그는 자신의 마음 속 두 여성 사이에서 자신의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스무 살을 보낸다.
개인적으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라는 키워드가 이 소설의 중심을 꿰뚫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오코가 치료를 받는 요양원은 무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벗 삼아 생활하며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곳이다. 와타나베는 그곳에서 머무는 3일 동안 스태프와 환자를 구분하지 못한다. 오히려 의사인 마야타는 사람들에게 이상한 연설을 맥락도 없이 늘어놓는 등 사회성이 부족하고 전에 있던 기노시타라는 경리는 노이로제로 자살을 시도했으며 도쿠시마라는 전 간호사는 알코올 중독이 심해서 잘렸다. 와타나베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말한다. “환자와 스태프를 전부 바꿔도 될 정도네요.” 그러한 와타나베에게 나오코와 같은 방을 쓰던 레이코 씨는 “우리에게도 아주 정상적인 부분이 있어. 그건 우리는 스스로 비정상이란 걸 안다는 거지.”라는 말을 던진다.
가만히 소설을 보면 등장인물 중에서 정상적인 사람이 거의 없다. 와타나베의 선배 나가사와는 하루가 멀다고 술집에서 만난 여성들과 원나잇을 즐기면서도 그에 대한 죄책감도 하나 없고 스스로 금욕주의라고까지 말한다. 그의 여자친구인 하쓰미는 돈 많은 집안의 딸들이 다니는 여대에 재학 중인 좋은 집안의 고상한 성품을 가진 아가씨이면서 남자친구인 나가사와가 다른 여자들과 섹스를 하고 다니는 것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인한다. 와타나베의 룸메이트였던 특공대는 행동 하나만 봐도 흔히 말하는 정상은 아니고 등장하는 다른 단역들도 마찬가지로 평범한 정상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 이런 사람들이 사는 바깥 세계와 요양원 속 세계를 비교하던 와타나베는 요양원에서 돌아오던 저녁, 신주쿠의 레코드 가게에 아르바이트하러 간다. 그는 가게 밖으로 비치는 스스로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비정상적인 광경에 혼란스러워한다.
스스로가 비정상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요양원 속 세계와 스스로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경제적 풍요에 힘입어 방탕한 생활과 육체적 쾌락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바깥 세계. 필자는 작가가 이 둘의 극명한 비교를 통해 1960年代 고도성장기의 일본이 가진 문제점들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성장이 급속화되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당시의 일본 사회 자체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과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무엇인지 한 번 더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
또 한편으로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도 꼭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인 듯싶어 씁쓸하다. 이 소설이 던지는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무엇이며 과연 당시의 일본 사회는 정상인가?”라는 물음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청춘들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워낙 유명하고 서평도 많은 대작이다. 그래서 나로서는 감히 평가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 수용하는 것에 있어 아직도 상당히 혼란스럽고 어려운 소설임은 부정할 수 없다. 거기에다 책을 읽다 보면 노골적인 성적 표현과 수많은 인물에 갑작스러운 자살도 혼란을 가중했다. 그래서 더 자주 더 많이 읽었던 소설이다. 나는 어느 하나 특별한 것 없던 주인공 와타나베의 아픔을 잔인하게도 하나하나 쫒아가며 읽었다.
혹자는 이 소설에 대해 성적 표현과 자살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이 불편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너무나 침체되는 침묵의 분위기에 깊이 빨려 들어가는 소설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잠시 조용히 읽어 보길 권하는 건 소설 속 구절들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상실의 아픔을 대처하는 법 말이다.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할 거야. 어른이 되는 거지. 그리고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치러야만 해.”, “편지 같은 건 그냥 종잇조각이잖아요, 불태워도 마음에 남을 건 남고, 새겨둬도 사라질 건 사라져 가는 거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4번 째 문단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할 거야. 어른이 되는 거지. 그리고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치러야만 해.
-마지막 문단
편지 같은 건 그냥 종잇조각이잖아요, 불태워도 마음에 남을 건 남고, 새겨둬도 사라질 건 사라져 가는 거죠.
-마지막 문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