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작가의 말에 공감한 오늘
장르 가리지 않고 읽는 행위가 일상이 된 나는 오늘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읽다 '끝없이 읽는 것은 난정이 찾은 자기 보호법이었다.'는 말에 공감했다. 자기 보호라? 혹은 고민에서 멀어지고 싶은 '도피'라고 나는 생각한 적이 있다. 이어지는 소설에서는 '낙관을 위해,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만 한 게 없었다.' ㅡ중간 생략ㅡ '보고 싶어 내내 우는 대신 계속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소원을 비는 사람처럼 책 탑을 쌓았다. 딸이 남기고 간 빈 공간을 책으로 채웠다.' 마음이 먹먹한 이 표현 안에서 버티고 있는 내용과 비슷한 맥락이랄까. 무언가를 '탐닉'하기 위해 나는 매일 읽고 있고 오늘 내 책장에 책은 계속 쌓이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독서대에 편하게 누워있고, 겹쳐 읽는 책들이 다른 독서대와 책상 여기저기 표지가 눈에 보이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침대 머리 밭에도 한 두 권이 있고 또 조금 전 찜한 책을 수시로 넣어두는 알라딘 장바구니에 들어가 살펴보고 넣어둔 책을 뺐다 다시 넣었다를 서너 번, 굿즈 선택도 신중히 하여 결제하지 않았던가. 내가 주문한 책이 집으로 도착하지 까지도 내 책장이 쌓이고 있는 것이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처럼 누군가가 그리워서 혹은 나처럼 알 수 없는 무의식 안에 있는 고민에서 탈피하고자 그리고 항상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 사고인 지구 혹은 우주에서 벌어지는 내가 모르는 '무엇'을 '모든 것'을 탐구하고 싶어서 계속 읽는다. 그리고 최근 '쓰는 이유'가 좀 더 명확해졌다. 소설가 월터 모슬리의 말에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글쓰기가 기본적으로 무의식적인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나의 머리에 있는 의식 세계보다 크다고. 글을 쓰는 동안 내가 불러내는 연결, 분위기, 비유, 경험은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당연한 것 같으면서 진지하게 처음 접하는 글에 공감하고 매료당했다. 매일 써야만 그 무의식의 공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에 '쓰지 않은 날'에 후회가 된다. 그동안 '쓰기' 행위를 하며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난 일에 스스로 위로를 받기도 하고 심지어 해결책을 받듯이 스스로 글로써 결론을 내려본 경험이 적지 않다. 이 신기한 경험을 '우연'으로 받아들였으나 결국 나의 무의식과 현재, 오늘의 내가 연결되어 대화를 나눈 셈이다. 와우. 그동안 '나는 쓰고 나면 숨통이 좀 트여'라는 말로 '징크스'라도 되는 마냥 읽고 읽는 행위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쓰기'에서 위로를 받았고 그래서 쓰는 행위가 마냥 좋고 스스로 신성하다고 까지 생각했다. 신의 계시 이런 것처럼 내가 나 스스로에게 매번 해결책을 던져줬으니 말이다.
아마도ㅡ이런 번역체에 너무 익숙한 독자의 단어 선택이라니ㅡ 철학자나 미학자, 작가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사색'과 '쓰기' 행위를 훨씬 많이 하기 때문에 철학자로 살 수 있고 작가로 살 수 있는 것이리라. 나는 누가 사뭇히게 그립거나 뼈를 깎는 고민ㅡ뼈를 묻어가고 뚜껑이 열렸다 닫혔다는 수십수만 번 반복하며 살아사는 건 사실이다 ㅡ때문에 혹은 크건 작건 떳떳하지 못한 행위나 범죄 비슷한 것에서 달아나려고 안달을 하는 것보다 나 자신에 대해 더 '알기' ㅡ고백하는데 국어 시간에 철수야, 안녕 을 배우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해오던 고민이다ㅡ를 원하고, 이 세계 우주 만물이 돌아가는 모든 것이 궁금하고ㅡ 성인 ADHD 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는다. 궁금한 채로 죽는 게 억울할 것 같다.ㅡ 잘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연구하고 싶다. 이건 순수하게 탐구하고자 하는 나의 욕구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가 원치 않지만 주변에서 또한 의도치 않게 피해를 줄 수 있는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고 있다면 그 어떤 거짓과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으니까. 드센 몸짓과 말투로 협박에 가깝게 밀어붙인다 해도 말이다. 성격도 조금 더 강하게 고쳐지지 않을까 기대해 보면서, 자신을 찾고 진리를 찾아 오늘도 읽고 쓴다. ㅡ내일이 생일인 오늘 하늘 2020.7.26.sun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