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뇌졸중의날 특집 2편 와파린, 쥐 잡는 독약에서 생명 살리는 약으로
건전지는 지난번 글에서 환절기에 발병률이 올라가는 뇌졸중의 증상과 예방법, 조심해야 할 내용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대부분의 뇌졸중은 뇌혈관이 막혀서 혈류가 제대로 흐르지 못해 뇌조직이 손상될 때 발생해요. 이 때 뇌혈관을 막는 것이 바로 혈전(Thrombus ; 피떡)이죠. 심방세동이나 정맥혈전 환자의 경우 일반인보다 혈전이 생기기 쉬워 특히 문제가 됩니다.
혈전은 예방이 무척 중요합니다. 한번 만들어진 혈전은 혈관을 따라 온몸을 돌아다니다가 혈관이 좁아진 곳에서 피의 흐름을 막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혈전 예방을 위해 사용되는 항응고제 약물 중 가장 흔히 사용되는 것이 바로 ‘와파린’ 이에요. 그런데 이 와파린이 원래 쥐약으로 쓰이던 약이란 걸 아시나요? 와파린이 쥐 잡는 약에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약이 되기까지 우리 나라가 아주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요? 지금부터 그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1933년의 어느 겨울날, 위스콘신 농업대학에서 생화학을 연구하던 칼 폴 링크(Karl Paul Link,1901~1978) 교수는 근방에 살던 한 농부의 의뢰를 받게 됩니다. 낙농업에 종사하던 에드 카슨(Ed Carson) 씨는 위스콘신 주의 다른 농부들처럼 전동싸리풀(Sweet clover; Melilous officinalis) 사료를 기르던 소에게 먹이고 있었는데, 몇 년째 소들이 조금만 다쳐도 피가 멎지 않아 출혈사하는 병(*Sweet clover disease) 이 돌아 큰 손해를 보고 있었어요.
이 소 출혈병은 이미 1920년대 초부터 북미 대륙의 농부들에게 무척 골치 아픈 존재였답니다. 사실 카슨 씨가 링크 교수를 찾아간 시점보다 조금 앞선 때, 캐나다의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가 소들이 먹는 전동싸리풀 사료가 발효될 때 생성되는 어떤 항응고 물질이 피가 멎지 않는 원인일 거라고 추정해 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정확한 발생 기전까지는 모르는 상태였죠.
그런데 이 스코필드 박사님,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세요? 사실 그는 우리 한국인에게 매우 친숙하고 또 고마운 분입니다. 바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자 건국훈장 수훈자, 기미독립선언서의 민족 대표 33인에 이은 '34번째 민족대표', 석호필(石虎弼) 선생과 동일 인물이거든요! 박사는 젊은 시절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대)에 근무하면서 일제의 만행을 직접 목격했고, 이에 분개하여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당시 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인 신분을 이용해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여러 사진과 기록을 남겼어요. 지금 남아있는 3.1 운동 관련 사진은 대부분 그의 활약 덕택에 전해진 것입니다. 특히 그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직접 취재해 일제의 만행을 처음으로 서방 세계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일제의 눈 밖에 난 그는 갖은 고초를 당하다 암살 미수 사건까지 겪게 되죠. 이후 잠시 몸을 피해 모교인 온타리오 수의대로 돌아갔고, 이 시기에 발표한 것이 위에 언급한 소 출혈병을 연구한 첫 학술 논문[1]이랍니다. 바로 이 논문이 수년 뒤 위스콘신으로 전해져 링크 교수와 그의 팀이 와파린을 개발하는 데 지표가 되어준 거예요. 참 신기한 우연이죠?
※석호필 선생의 더 많은 업적이 궁금하신 분은 이쪽으로:
다시 1933년으로 돌아가 봐요. 링크 교수와 그의 팀은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을 참고해 소 출혈병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수년간의 연구 끝에 그들은 전동싸리풀 속의 천연 성분인 쿠마린(Coumarin)이 발효하면 혈액 응고를 방해하는 항응고성 물질이 생성되는 것을 확인하고 디쿠마롤 (Dicumarol) 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스코필드 박사의 발상이 맞았던 거예요!
1940년대, 링크 교수는 불행히도 결핵에 걸리게 됩니다. 대학을 떠나 당시의 치료 관행대로 결핵 전문 요양원에 입원한 그는 어느 날 잡담을 나누다 요양원 시설을 들쑤시는 쥐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순간 그가 떠올린 건 바로 자신이 연구했던 디쿠마롤이었어요. 출혈병에 걸린 소들이 피가 멈추지 않아 죽었듯, 쥐 또한 디쿠마롤을 섭취하면 아주 사소한 상처에도 죽게 될 거라는 착안을 해냈던 것이죠! 그는 디쿠마롤을 활용해 새롭고 효과 좋은 쥐약을 개발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결핵이 완치된 링크 교수는 대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1946년에 디쿠마롤의 항응고 작용을 강화한 신물질, 와파린을 발표하죠. 와파린(Warfarin) 이라는 이름은 링크 교수의 연구를 금전적으로 지원했던 '위스콘신 동문 연구 재단(WARF)' 과 디쿠마롤의 원료 물질인 ‘쿠마린’을 합성한 명칭이에요[2]. 링크는 와파린의 권리를 WARF재단에 양도했고, 재단은 그의 의도에 따라 유해조수 구제 용도로 이 새로운 물질의 특허를 신청합니다. 그렇게 1948년, 와파린은 마침내 ‘최신 쥐약’ 으로 세상에 등장하게 돼요.
한동안 와파린은 효과 좋은 쥐약 (Rodenticide) 의 대명사로 통했답니다. 옥수수와 섞어 뿌려 놓으면 쥐떼 박멸 효과가 아주 좋았다고 하네요! 쥐가 와파린을 섭취하면 출혈사하게 될 거라고 예측한 링크 교수의 생각이 정확했던 거죠. 그런데 반전의 제3막이 시작합니다. 여기서 또다시 우리 대한민국이 등장해요.
1951년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입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한때 서울을 수복했던 우리 측 연합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고 있을 때죠. 당시 미국은 수백만 군인들을 한반도로 보내 우리 나라를 돕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해군 신병이 한국 파병 명령을 받게 됩니다. 전장으로 끌려갈 처지를 비관한 그는 와파린을 아주 많이 먹는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어요. 당시에 이 약은 효과 만점 쥐약으로 통하고 있었고, 예나 지금이나 쥐약은 독약으로 취급되니 그리 이상한 행동은 아니었죠.
정말 이상한 일은 다음날 벌어집니다. 신병이 죽기는커녕 아주 편안히 깨어났던 거예요. 놀란 청년은 다시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또 실패했죠! 그렇게 6일이 흐르고, 모든 것을 체념한 이 신병은 자기 발로 해군병.원을 찾아가 군의관에게 사실을 고백합니다. 쥐약을 567mg이나 삼킨 상태로 말이죠! 이를 본 의료진은 와파린이 인체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약물이라는 걸 눈치채고 연구를 시작해요[5].
쥐에게는 치명적이었던 와파린, 왜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까요? 비결은 바로 비타민K(필로퀴논phylloquinone)였습니다. 쥐와는 달리, 우리 인간의 피 속에는 혈액 응고 작용을 돕는 비타민K가 많이 들어있거든요!
비타민K는 간에서 ‘프로트롬빈(prothrombin)’ 이라는 단백질을 비롯해 여러가지 혈액 응고 인자의 생성에 관여해요. 역할을 마치고 간에서 산화된 비타민K는 에폭사이드 환원효소(Epoxide Reductase)를 만나 재활용되는데, 와파린은 이 환원 반응을 막아요. 이러면 비타민 K가 재활용되지 않고, 결국 혈액 응고 인자가 생성되지 않아 출혈이 발생한답니다. 그런데 비타민K를 충분히 섭취하면 와파린을 쓰더라도 와파린의 효과가 상쇄돼–이런 경우를 ‘길항작용(antagonism)’이라고 불러요-출혈이 발생하지 않아요[7].
※비타민K를 더 잘 알고 싶으시다면? 이 매거진을 읽어보세요:
1955년, 당시의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별장에서 휴가를 즐기다 심근경색 발작을 일으킵니다. 의료진은 대통령의 심장마비가 뇌졸중으로 발전할까 걱정했답니다. 이 때 주목한 것이 바로 와파린이었어요. 의료진은 뇌졸중을 유발할 수 있는 혈전을 억제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와파린을 투여했고, 결국 심장마비의 치명적인 후유증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어요! 이 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와파린의 안전성을 선전하는 계기가 됐답니다[8][9]. 이제 와파린은 심혈관계 질환에 처방되는 표준 항응고제로 널리 쓰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있어요. 참 신기하죠?
만약 석호필 선생이 3.1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래서 일제의 탄압을 받고 조기 귀국하지 않았다면, 선생의 논문이 없었다면 링크 박사의 연구는 순탄히 진행될 수 있었을까요? 만약 한국전쟁이 없었다면요? 그래서 전쟁을 싫어했던 신병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와파린을 가지고 인체 실험을 하지 않았다면, 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와파린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에 우연은 없다지만, 이렇게 기묘한 사건의 연결 앞에서는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모든 것이 이어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쥐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와파린은 용량과 복용법을 잘 조절하면 인간에게는 심한 출혈을 일으키지 않아요. 더군다나 와파린은 먹는 약이기 때문에 비교적 환자가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답니다.
하지만 와파린은 단점도 있어요. 이 약은 다른 약물이나 건강기능식품과 병용하면 상호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서 써야 해요. 요컨대 약물상호작용이 와파린의 효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답니다. 와파린의 효과가 커지면 출혈이 발생하고, 반대로 와파린의 효과를 떨어뜨리면 혈액 응고를 막지 못해 또 문제가 발생해요. 다음의 특집 3편 포스팅에서는 와파린 사용 시 상호작용을 주의해야 할 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을 전부 알려드릴게요!
글을 읽고 와파린과 관련된 궁금한 점 또는 별도 문의가 있으시다면, 댓글이나 필톡의 카카오채널 1:1 채팅창에 말씀해 주세요. 건전지&필톡의 전문가들이 상세히 답변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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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Schofield FW. A Brief Account of a Disease in Cattle Simulating Hemorrhagic Septicaemia due to Feeding Sweet Clover. Can Vet J. 1984 Dec;25(12):453-5. PMID: 17422488; PMCID: PMC1790685.
[2]Walters, K. (2015). Of Rats and Men: Warfarin Becomes World Famous by 1955. Wisconsin Alumni Research Foundation. url: https://www.warf.org/announcement/of-rats-and-men-warfarin-becomes-world-famous-by-1955/
[3] Wisconsin Alumni Research Foundation. Karl Paul Link. (n.d.). url: https://www.warf.org/stories/karl-paul-link/
[4]Norman Saunders(Dec 1951). G.I. Joe in Korean Family Man. G.I. Joe #6. Ziff Davis. url: https://comicbookplus.com/?dlid=4818
[5][8]백승만(2022).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동아시아.
[6] Steiner T, Rosand J, Diringer M. Intracerebral hemorrhage associated with oral anticoagulant therapy: current practices and unresolved questions. Stroke. 2006 Jan;37(1):256-62. doi: 10.1161/01.STR.0000196989.09900.f8. Epub 2005 Dec 8. PMID: 16339459.
[7] 국가건강정보포털(2021). 항응고요법. 질병관리청. https://health.kdca.go.kr/healthinfo/biz/health/gnrlzHealthInfo/gnrlzHealthInfo/gnrlzHealthInfoView.do?cntnts_sn=5544
[9] Ramya Rajagopalan(2018.3.30). A Study In Scarlet in Distillations magazine. Science History Institute. https://www.sciencehistory.org/stories/magazine/a-study-in-scarl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