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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Dec 19. 2023

취생열전

고어체 따라해보기

 취생(醉生)은 술마시고 글쓰며 세월을 보내다 코로나로 생계가 곤란해지자 이립에 이르러 뒤늦게 스타트업 총무로 출사했다. 경영지원 소속으로 애이치알(哀理治斡)을 담당하는 팀장을 섬겼다. 팀장은 대표로부터 늘 구박을 받아 취생은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하루는 참석인원 둘 뿐인 경영지원 회의를 하다 취생이 이르기를,


 - 공께서는 후삼국시대의 소년 재상 최응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 들어본 적은 있는 듯 하나 자세히는 알지 못하오.


 - 그는 일찍이 재능을 보여 이미 십대에 궁예의 부름으로 관직을 받았다고 하니 이는 저와 다른 점이며, 총명하여 사물과 사건의 내면을 알았다고 하니 이는 저와 같은 점입니다.


 - 그대가 제 입으로 제 칭찬을 하는 것은 봐도봐도 익숙해지지 않소만, 계속해보시오.


 - 널리 알려졌듯 궁예는 마피아나 야쿠자처럼 깡패식으로 조직을 운영했습니다. 마이너일 때는 그것도 나쁠 것 없을지 모르나 메이저에 들어서서도 같은 방식을 고수했으니 그의 패망은 이미 정해졌다 할 것입니다. 그는 조직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허풍과 협박을 사용했는데, 이른바 '관심법'으로 속내를 꿰뚫어본다며 공갈을 쳐서 다그치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부하들도 궁예 자신도 개억지인 것쯤이야 알고 있었겠으나, 때때로 개억지를 권위를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여기는 이가 있다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조직에 속해있는 저와 공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몇몇 신하들을 윽박질러 권력의 작동을 확인한 궁예는 본 목표였을 고려 태조, 왕건을 겨냥합니다. 왕건은 단순한 2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휘하의 인력과 자원은 궁예가 아닌 왕건을 섬기는 것이었으므로, 함부로 할 수 없는 껄끄러운 상대였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궁예의 목표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궁예는 전사 미팅 때 뜬금없이 왕건을 다그칩니다. '너 이 씹새끼, 나한테 역심품었지?!' 왕건을 포함한 모두가 말문이 막혔을 때 그것이 초능력도 광태도 아니라는 것을, 왕건과 자신의 상하관계를 모두에게 확인시키기 위함이라는 진의를 통찰한 것은 오직 최응이었습니다. 최응은 부러 볼펜을 떨어뜨리고 몸을 책상 아래로 숙였습니다.


 - 그대가 다른 직원들로 인해 기분이 상했을 때 관리 안되는 표정과 입으로 중얼거리는 욕설을 가리기 위해 즐겨 시전하는 계책 아니오?


 - 바로 그렇습니다. 당시 궁예의 조정 구조는 특이하게도 책상 아래로 몸을 숙이면 아무도 모르게 타인에게 자기 말을 전달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최응은 왕건에게 조용히 헌책했습니다. '역모를 꾸몄다 인정하십시오. 그래야 삽니다.' 헤아려보건데 왕건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궁예의 본심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망설이지 않고 무릎을 꿇은 뒤 역모를 인정하고 죄를 청했던 것입니다. 궁예는 만족했습니다. 온 조정에 왕건조차 자신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을 알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묻기는커녕 더 큰 권한을 주어 왕건을 추켜세웁니다. 위기를 벗어난 왕건은 후에 궁예를 몰아내고 대업을 이루게 됩니다. 소인은 평하니, 이 일화를 읽거나 들은 이 대부분은 최응의 영민함과 통찰력을 칭송하나, 도리어 고려 태조의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는 일화로 판단합니다. 그는 당대 삼한 최강 세력의 2인자이자 실질적인 공동창업자였습니다. 현재의 유니콘기업 COO내지 스톡옵션 많이 받은 애이치알 팀장급에 견줄만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위치에는 뛰어난 선비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날파리 같은 이들이 꾀어들기 마련입니다. 왕건에게 헌책한 이가 어찌 최응뿐이었겠나이까. 또 어찌 선비들이 왕건에게 늘 옳은 계책만을 주었겠나이까. 왕건은 옳은 말과 그른 말, 대업을 위한 말과 사욕을 위한 말, 현실을 직시하는 말과 아첨하는 말을 구분하는 지혜를 갖췄으니, 과연 수백년을 지속된 제국을 창업할만한 영웅이라 할 것입니다.


 팀장은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며 가로되


 - 그대의 잡학다식함을 일찍이 알고 있었으나 그 경계가 역사에도 이르렀으니 또한 새롭소. 그대의 이야기가 이미 많은 인사이투(認思利透)를 주었으되, 평소 그대의 방식을 고려하면 그 또한 본론을 위한 빌드업임을 알겠소.


 - 영민하신 공께서 판단하신 그대로입니다. 본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공께서 사내에서 정론을 펼치는 드문 분임을 소인을 비롯한 생각이 올바로 박힌 직원이라면 알고 있는 바이나, 사내 정치 역학을 외면하고는 정론을 끝내 실현하기 어렵습니다. 이제껏 이름이 남은 창업군주 왕건 또한 그러했는데 하물며 일개의 스타트업 팀장이겠습니까? 상급자에게 올바른 길을 헌책하는데 상책은 기분좋게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책은 기분도 상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귀공은 기분은 상하나마 받아들이는 것을 중책으로 삼으시나, 실은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세상만사 기분문제이며, 9할 9푼 9리도 아닌 10할이 그러합니다. 거 왜 소구라태수(蘇口拏太修)도 기분문제로 죽지 않았습니까? 진정 중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기분만은 좋게하는 것입니다. 귀공의 성향에 맞지 않음을 알고 있으나, 부디 반 년만 참아주시길 청합니다. 귀공이 대표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른다는 시그널을 지속해서 보낼 수 있다면 오래지 않아 상책을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인이 궁예와 왕건, 최응을 대표와 귀공, 소인에게 빗대어 길게 늘어놓은 이유입니다.


 팀장은 무릎을 철썩치며,


 - 선현이 이르길 과잉변설자필즉공산당원(舌者必卽黨員: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 하였으니, 그대가 뜻밖에 빨갱이임을 오늘에야 알게 되었소.


 - 과찬이십니다.


 그러나 후로도 팀장은 줄기차게 옳지만 대표 기분 상하게 하는 말만 하다가 취생을 뒤따라 퇴사했다. 시간이 지난 어느 초겨울, 자기 아비의 장지에서 취생이 당신은 꼴통에 반골기질 때문에 자방의 헌책을 무시했다 비난했고, 팀장은 빙그레 웃으며 순순히 인정할 뿐이었다. 상주가 하는 말은 다 옳다고 하는 옛관습이 아직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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