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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Oct 12. 2020

나나

보고싶다


 타즈매니아를 떠나 멜번에 온 뒤, 살인적인 도심의 집세에 질려 금방 거처를 옮겼다. 도심에서 동쪽으로 20킬로 정도 떨어진 동네였다. 링우드. 켈트족 민속신앙의 향취가 물씬한, 한국으로 치면 당산 정도의 이름이 아닌가 한다. 다녀본 동네 중 가장 현지인의 비율이 큰 동네였다. 그곳의 유일한 한인 쉐어하우스엔 나를 비롯한 세 명의 쉐어생과 주인집 부부, 그리고 빅토리아 주에서 가장 똑똑하고 귀엽고 아름다운 개, 두 살짜리 보더콜리 나나가 살았다.


 보더콜리는 원래 천재견이라고 한다. 함께 지내보니 확실히 똑똑한 개라기보단 조금 멍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체감상 만 세 살짜리 꼬맹이 만큼은 사람 말을 알아듣는 기색이다. 물론 서로의 인생관을 피력하거나 철학적 소견을 나누기는 힘들지만, 영어로 한다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지인들은 내가 개라면 질겁을 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개쪽에서 나를 싫어할 뿐이다. 그리고 나나는 내 생애 최초로 날 싫어하지 않는 개다. 나 아닌 누구라도 나만큼은 좋아하지만.


 맥주 사러 나가서 20분만에 돌아왔는데도 열쇠 돌리는 소리에 뒷마당에서 달려온 나나는 반갑다고 지랄발광을 한다. 이게 미쳤나 왜 이래 싶다가도, 공 던지기를 하면 던지는 사람이 먼저 지치는 엄청난 체력과 다른 개보다 몇 배는 더 고독과 무료함을 느끼게 할 지능을 생각하면 잠시 칼튼 드라이는 내려놓고 쭈그려 앉아 (서른이 된 이후로 그런 자세를 취하면 끄응 소리가 절로 난다) 배라도 긁어주게 된다.


 특히 피곤하고 힘든 날, 퇴근하자마자 쪼그려 앉아 남의 집 개 배 긁어주다 보면 아니 시발 사람 감정도 벅차서 끊으려는 참에 개 감정까지 공유해 줘야 돼? 싶기도 하다. 사실 너도 나와 같은 세입자잖아. 집세 지불 방식이 약간 다를 뿐이지.


 그러나 짧은 생애 대부분을 기다림으로 채워야 하는 운명을 생각하면, 그럼에도 불평할 줄 모르고 해맑게 꼬리나 흔드는 멍청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하릴 없이 다시 쭈그려 앉게 되는 것이다. 끄으응.


 나나 덕에 한국에 돌아오면 개를 키워볼까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집을 비우고 있을 시간 동안 개가 감내해야 할 것들을 모른 척할 자신이 없어 관두기로 했다.


 최소한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의 이름을 알던 사람만 기백명은 넘는 호주생활이었지만, 이따금 간절하게 보고 싶은 건 다름아닌 나나다. 그 정수리 부근에서 풍기는 개 특유의 '꼬순내'가 코끝에 스치는 듯 하다. 지금쯤 성견이 되어 전보다는 점잖아졌겠지. 부디 살아생전 다시 볼 일 없을 나나 또한 이따금 나를 생각하길, 그리고 그것이 좋은 기억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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