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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Jun 01. 2024

버려진 난초에 대한 단상

총무 업무에 난초에 물주기가 추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해요

 왕건은 고려 건국 이후 거란의 외교사절단이 선물로 보내온 낙타들을 어느 다리에 묶어두고 굶겨죽였다. 내 소년 시절 히트 드라마 속 최수종 아저씨의 모습을 회상하면 언뜻 아니 그 인품 훌륭한 형이 왜 그랬지 싶지만, 이후 수백년을 존속한 국가의 창업자인만큼 그도 대책없는 호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아직은 왕건의 지배 구조의 내부 결집력이 강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해결책 중 하나의 결과로 무수한 마누라들을 두어 천년의 후대인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절륜함을 뽐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게 중 비중이 꽤 크고 고려 영토 내에 권력 기반이 미미하여 그나마 믿을만한 것이 당대에 멸망한 발해 유민이었을텐데, 이들은 후대에 백두산 폭발설 등 크게 근거없는 설이 분분할 만큼 억소리도 못내고 멸망당한 원한으로 거란이라면 치를 떨었다. 어느정도냐면, 거란 외교 사절에게 '선물은 고맙지만 우리 사람 중에 너희를 되게 싫어하는 애들이 있어서 마음만 받기로 할게 ㅎㅎ' 정도의 중립적 제스처만으로도 왕건의 권력 구조 뿌리를 흔들 수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왕건은 전술한 포악하고 야만적인 방식의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정치인은 연예인 이상으로 퍼포먼스로 먹고사는 이들이다. 거 왜, 귀국길 국경을 넘자마자 원나라 옷을 찢어버렸다는 공민왕이나 충신이 구해온 귀한아들을 집어던졌다는 유비나, 가슴팍에 화살을 맞고도 발가락을 문질렀다는 고대의 창업군주처럼 말이다.


 더불어 그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훈요 10조의 한 조항을 통해 거란놈들은 금수같은 것들이니 결코 화친을 추진하지 말라고 정책 유지까지 주문했다. 그것은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비겁한 가치 판단 유예가 아니다. 동물권은 커녕 인권도 발견 혹은 발명되지 않은 시대이니 동물 보호의 관점은 배제하더라도, 그는 '국경을 맞댄, 전성기를 향해 가는 초강대국이랑 친하게 지내고 내부 결속 흔들기 vs 초강대국이랑 척지고 신생 국가의 내부 결속 튼튼히 하기'라는 딜레마에서 후자를 택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옳았던 것 같지만 후대에 3차에 걸쳐 이어진 고려거란 전쟁에서 고려는 아차하면 멸망할 뻔 했다. 어쨌든 왕건의 도박은 성공해서 고려거란 전쟁 이후 고려는 영광의 전성기를 이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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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축하의 선물로 받은 난초를 버리고 말고 또한 딱히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버릴 거면 동사무소에서 스티커 사다 붙인다음 조용히 버리면 될 것을 굳이 사진을 찍어서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는 모습이 다소 유치하다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비단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아니라도, 당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 사는 방식이니 어쩔 수 없다. 저들 또한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정치에 대한 냉소는 그닥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지만, 정도를 넘어선 감정의탁은 위험하기로는 그 이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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