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편 14

메모장 털기

by 김바롬

- 대리는 나보다 열살 어리다. 일을 하다가 근처에 핀 민들레를 훅 불어 씨앗을 퍼뜨리느라 2, 3초 정도 멈칫거리느라 욕을 먹고서는 빙글빙글 웃는다. 이후로 어쩐지 그가 좋아졌다.


- 불규칙하게 출근하는 이사와 고문이 있다. 고문에게는 모두가 고문님이라고만 부른다. 절대 성을 붙이지 않는다. 성씨가 '성'이기 때문이다.


- 아직도 가끔 아버지 꿈을 꾼다. 꿈에서 깨면 맞다, 그는 이미 죽었지 하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가 죽기 몇 달 전 마지막으로 했던 대화를 기억한다. 난 그냥 병상 옆에 앉아 있었다. 별로 할 말도 없고 해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럴 거면) 가라고 했다. 가지말라는 말이었겠지만, 나는 어리석은 척 진짜로 갔다.


-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해는 1492년이다. 어릴 때 선생님은 그것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첫발을 디디며 신발 한짝이 벗겨졌는데, '아이고내구두'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지어내서 외우라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충실히 외워서 비교적 최근까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해가 1418년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아이고내신발.


- 언젠가 캄차카 반도에 가서 오로라를 보고 싶다.


- 일생의 사랑에게 '내가 저축하게 하고 싶은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저축한게 한 푼도 없다는 뜻이잖아.


- 옳은 말이라고 해서 늘 맞는 말은 아니다. 신조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늘 기억하는 말이다. 덕분에 말실수로 맞고다니진 않았다.


-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코스모스에서 칼 세이건이 밝힌 바에 따르면 생각의 속도는 초속 90미터 정도 된다고 한다. 언젠가 우사인 볼트의 훈련에 대해 읽은 적이 있는데, 귀로 들은 청각신호가 뇌를 거쳐 다리를 움직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그 신호가 다리에 도달하기까지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귀로 소리를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달려나가는 훈련이라고 했다. 천상계는 속세와 다르구나 하는 걸 절감했던 일화다. 나는 보다 헛되고 쓸모없는 상상을 한다. 지금 문득 네가 떠올랐다면, (나와 너와의 거리/90m)초 전에 너 또한 나를 떠올렸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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