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장 털기 3
- 심신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얼마전, 출근 버스에서 졸다가 정거장을 잘못 내렸다. 별 일도 아니었는데 하늘을 향해 와아아악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할 수 없이 남은 출근길 30분 가량을 걸었다. 그런데 글쎄 거짓말처럼 심신이 안정되는 것이었다. 아침 햇살과 걷기라는 행위가 시너지를 일으킨 것 같았다. 인간 몸의 기작이라는게 생각보다 단순한 것 같아 적이 용기를 얻었다. 얼마 후엔 친구가 전화하여 듣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요새 상황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았다. 내일 출근길에 잘못 내려보는 건 어때? 의외로 다 잘 풀릴지도 몰라, 라는 솔루션을 제공하려다 가까스로 억눌렀다. 괜히 뺨아리만 맞았을 것이다.
- 옷장을 열면 왕궁수문장부터 지금의 공장까지 그간 일했던 곳 유니폼이 절반이다. 그 자체로 내 인생의 파노라마인 듯 하다. 장관이 아닐 수 없다.
- 나의 꿈은 일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일하는 것. 그리고 불로장생이다.
- 남자들 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건, 알고보니 연인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매우 성숙한 태도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남녀를 바꾸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 말과 글로 욕 대신 해주는 알바로 생계를 꾸리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 습작을 구상하다 관두기로 했다. 욕 대신 해주는 업무쯤이야 실은 현실에서도 차고 넘친다.
- 은행에 들렀는데 보안요원이 안내해주던 어르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오죽 했으면이라는 생각과 그래도 조금만 친절했으면이라는 마음이 뒤섞여 결론을 낼 수 없었다. 뭐 꼭 결론을 내야만 하나. 눈치없는 사람인척 끼어들어 이미 아는 걸 물어봤다.
- 언젠가 쿠팡 물류센터에 당일치기 알바를 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누군가가 손에 '형법요론'을 들고 열심히 읽고 있었다. 옆면에 빼곡한 형형색색의 인덱스 테이프가 너무 깔끔하기도 해서 속으로 염병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업무 중 담배 피우는 시간을 활용해 글을 쓰면서, 몇 달 전 그 이름모를 고시생에게 사과하는 마음을 전한다.
- 언젠가 제주도의 법조인이 길에서 변태 행위를 하다 뉴스를 타서 개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난 마침 해당 뉴스를 큰이모네 놀러갔다가 보았다. 큰이모는 젊었을적 연애 한 번 못해보고 노냥 틀어박혀 공부만 하다보면 저렇게 변태가 되는 법이라고 했다. 외삼촌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음란 행위를 했다는게 구체적으로 뭘 어쨌다는 거야?다 내놓고 다녔다는 거야? 큰이모가 벌컥 화를 내듯 말했다. 내놓기만 했간디? 아 글씨 흔들었댜! 나는 이어진 이모의 말에 웃느라 뱃가죽이 찢어질 뻔 했다. 마누라 앞에서 흔들면 잘한다고 칭찬이나 받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