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편 18

메모장 털기 5

by 김바롬

- 들어온 지 1주일 된 신입 동료가 조심스레 다가와 묻는다.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난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말했다. 화장실 정도는 그냥 다녀오셔도 돼요. 자연스럽게, 영화 쇼생크 탈출이 생각났다. 수십 년 간 감옥에서 생활했던 모건 프리먼은 사회에 나와 마트에서 일하던 중 (아마도 그가 수감생활을 했다는 걸 알고 있는) 매니저에게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냐고 묻다가 꼽을 먹는다. 레드, 화장실은 그냥 다녀와도 돼요. 모건 프리먼은 당황한다. 지난 수십 년 간 늘 화장실을 허락받고 다녀왔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자유주의 국가 20대 청년이 수십 년 간 수감 생활을 했던 캐릭터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된 걸까? 난 동료가 입고 있는 옷, 즉 'ROKA'라고 써진 티에 힌트가 있다고 본다. 문득, 자유주의를 지키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전체주의적인 조직에 끌려갔다 와야 했던 이 땅의 청춘들에 대한 가엾음이 밀려왔다. 쇼생크 전역을 하고도, 각자의 지후아타네오를 찾지 못하고 안양 모처 아파트형 공장에서 납땜을 하고 있다. 뭐, 그에 비하면 난 덜 불쌍하긴 하다. 난 전역 말고 쇼생크 소집해제 했거든. 허락 따윈 구하지 않고 하루에도 화장실을 열두 번씩 간다.


-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바스락거리는 발걸음 소리 같아 자꾸만 뒤를 돌아봤던 밤이 있었다. 왜 자꾸 그 장면이 생각나나 했더니 거기도 안양이었다.


- 가끔씩 죽는 꿈울 꾼다. 자동차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엘리베이터가 추락하기도 하고 심지어 킬러가 누군가의 발주를 받아 날 죽이기도 한다. 심장이 안팎으로 뒤집히는듯한 어마어마한 공포 끝에 체념의 시간이 오고, 점차 어두워지는 시야와 함께 난 중얼거린다. 드디어 사후세계에 대해 확인해 볼 수 있겠네. 그리고 으레 눈을 뜬다. 한참을 멍하니 어리둥절하던 나는 곧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시대의 장자마냥 탄식하는 것이다. 지옥에 떨어진 것인가, 지옥으로 떨어진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지각 안 하고, 꼬박꼬박 출근하고 있다.


- 영화 <영웅>은 개봉 시점 즈음 움트기 시작했던 중화 패권주의를 옹호하는 프로파간다 영화였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견자단이 자신을 체포하러 온 병사들과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치기 전에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장면은 참 멋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꼬박꼬박 출근한 나도 사람들에게 꼬박꼬박 인사한다.


- 영조가 사도세자를 미치게 한 주요한 수단이 극한의 마이크로매니징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일을 제대로 하려면 운전면허를 따야 한다. 오전 반차를 쓰고 필기시험을 보러 갔다. 시험 시작 전 사장에게 전화가 왔다. 응원이라도 해주려나 했더니 내가 반차 쓴 걸 까먹고 왜 안 오냐 묻는다. 내가 쇼생크 무단 퇴사한 게 아니란 걸 확인하고 적이 안심한 기색이다. 오늘 당장이라도 퇴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통을 나누니 반이 되었다. 여담이지만 시험은 당연하게도 넉넉한 점수로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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