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빠
- 옛적에 아이스크림 구구크러스터 광고가 있었다. '나도 구구 탤런트'라는 이름으로, 길가던 일반인에게 구구크러스터를 들려주고 '구구크러스터~'라고 외치게 만든걸 엮어서 광고를 만든 것이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구구크러스터를 들고 왔다. 어느 카메라 앞에서 '구구크러스터~'라고 외친 후 받아왔다고 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이후 몇 주 간 만화보다 광고를 더 집중해서 봤고 예의 구구크러스터 광고가 나올 때는 브라운관 안으로 빨려들어갈 듯 자세히 봤지만 끝내 아버지는 티비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뻥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좋아져서 유튜브로도 당시 광고를 볼 수 있다. 얼마 전엔 술에 취해 당시 나왔던 구구크러스터 광고를 다 보았다. 역시나 아버지는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확신하지만 뻥이었을 것이다.
- 3번째 이상인 건 확실하고 외가 식구들이 간혹 언급하는 파편적 정보들을 조합해 봤을 때 최대 6번째에 이르는 나의 작은 이모부는 어머니를 장모님처럼 모신다. 자신을 위해 늘 부처님께 기도해주시기 때문이란다. 엄마가 그런 기도도 해줘요? 어머니는 시니컬 하게 답한다. 한 번도 해본 적 앖는데? 작은 이모는 프로패셔널 연하 킬러다. 주 사냥법은 가족이 없는 외로운 남자들에게 가족의 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인데, 이번에는 둘째 언니인 나의 어머니를 적극 활용하는 모양이다. 그 삿되고 불순한 의도가 불쾌하지 않은 건 아니나 딱히 어머니에게 해될 것도 없는 듯 해 그냥 냅두고 있다. 하긴, 내가 그냥 냅두지 않으면 뭘 또 어쩐단 말인가? 그러고보면 세번째인지 여섯번째인지 작은 이모부도 참 딱하다. 석가모니는 종교인이 아니라 위대한 철학자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 그가 제자들에게 미지의 존재에게 빌어서 복을 구하라 가르쳤을 것 같진 않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가르침 중 종교적 색채가 묻어나오는 것은 힌두교나 그 전신 브라만교의 영향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애초에 인간의 사념이 두개골을 뚫고 차원을 초월해 미지의 전능한 존재에게 가닿아 또 그 존재가 물리학 법칙에 위배되는 리턴을 줄 거라는 발상 자체가 납득할 수 없는 바이다. 이런 장광설을 늘어 놓았더니 어머니는 내일 모레 마흔인 아들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퉁박을 준다. 그래도 내가 기도해서 네가 이만큼이라도 사는 거야.
- 어느새 고전 케이팝이 되어버린 소녀시대의 gee는 내 고단했던 20대에 폭포수처럼 쏟아부은 축복과도 같은 곡이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어쩐지 쑥쓰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새 핸드폰 벨소리를 예의 곡으로 바꿔달라는 요청을 했다. 난 그런 식으로 평생 뒤쳐져 있던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보려는 시도를, 그리고 그 시도 안에 숨겨진, 이미 파국만을 기다리고 있는 부자 관계에 대한 회복의 시도를 가소롭고 가엾게 여겼다. 아버지는 그 핸드폰을 이후로도 10년 넘게 썼다. 벨소리도 늘 같았다. 지지지지 베베베베베베.
- 겪어본 바 시각 장애인은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아마도 남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서 그럴테다. 방귀에는 소리가 난다는 걸 뒤늦게 알게됐다는 청각 장애인처럼. 점점 눈이 나빠지는 어머니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는 아닐까?
- 젊은 어머니는 어린 나를 앞에 앉혀두고 자작곡을 불러주곤 했다. 바롬이는 아빠의 꿈이고요 바롬이는 엄마의 희망이래요라고 시작하는 노래였다. 브릿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에 바롬이는 세상에서 하고 한박자 쉬어주면 어린 내가 마무리를 지었다. 쵝오! 고작 나를 꿈이자 희망으로 삼았던, 죽은 아빠와 그와 크게 다를 것 없는 건강 상태의 엄마의 순박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연민으로 종종 가슴을 회칼로 저미는 듯 아파서 미칠 것만 같다. 물론 오래가진 않는다. 그들이 내게 어떤 기대를 하든 자유지만 내겐 딱히 부응해야할 의무는 없으니까. 어매, 어매, 불쌍한 우리 어매. 우리 어매 불쌍해도 우면서 나는 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