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의 노래

김훈 선생 따라잡기

by 김바롬

관악산 능선에 선홍이 번졌다. 산의 이내가 노을 빛으로 선명해 그 뒤는 세상의 가장자리인 듯 싶었다. 낮 내내 조용하던 오피스텔 촌은 노을의 흔적이 사라지고 나서 활발해졌다. 제각기 하루 분의 피로를 짊어진 남녀가 편의점에 몰려와 술과 담배와 먹거리를, 때로는 두통약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냉장고 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보던 남자가 생수를 내려놓고 핫식스를 집어들었다.


나의 출근시간은 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잠시 후 다시 몰려올, 더 많은 피로와 취기를 짊어지고 있을 자들의 밀려듦을 대비하는 시간이었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진열대의 공백을 채우는 내 모습을 지친 사장 아들이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 수고가 많았소.

- 무운을 비오.


인수인계가 끝나면 사장 아들은 무덤덤한 인사와 함께 사라졌다.


교대자의 퇴근 후 가장 먼저 하는 것은 폐기 상품 확인이었다. 천조국집 아들이 짜장면을 먹지 않듯, 사장 아들 또한 삼각 김밥 따위는 입에도 대지 않아, 과연 유통기한을 막 넘긴 음식물이 그득했다. 이곳이 천국 아닌가 하는 자문은 전임지였던 ㅍ훼미리 마트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내가 가진 한 줌의 금전 중 식비를 아낄 수 있는 것은 천행이었다. 치미는 욕지기와 함께 삼각 김밥을 씹었다. 데우지 않아 딱딱한 밥알은 한참을 씹어도 무르지 않아, 어금니로 한 알 씩 온전히 으깨었다.


샌드위치는 먹지 않았다. 샌드위치는 유통기한을 몇 초만 넘겨도 뒷일을 가늠할 수 없었다. 아무도 안 쓰는 업무일지 맨 뒷면에는 유통기한을 넘겨도 탈나지 않는 음식과 흔히 탈나는 음식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샌드위치는 흔히 탈나는 음식의 첫번째였다. 그 목록의 작성자를 알아보려 했으나 알바생마다 말이 달라 종잡을 수 없었다.


그 작성자는 초대 새벽 알바생으로, 삼백여 개 상품의 바코드 번호와 백여 종류 담배의 타르 함량을 외우고 있었으며 지금은 직영점으로 이직해 점장 노릇을 하고 있다고 했다. 혹 그는 백초를 맛보고 그 약효를 전한 의학의 시조 염제 신농의 자손으로, 조상의 업적을 본 떠 모든 유통기한이 다한 음식을 맛보고 심한 토사곽란으로 항문이 헐어 죽었는데, 지금도 알바생 의자 위에 놓인 때묻은 도넛 방석이 그의 유품이라고도 했다. 혹 그는 사장 자신으로, 게으른 알바생이 유통기한 확인을 철저히 하도록 작성했다고도 했다.


군복 무늬 티셔츠에 같은 무늬 쿨토시를 찬 객이 들어왔다. 대한민국 어버이 연합원의 복식이었다. 수많은 아수라를 돌파한 자의 살기를 몸 속 깊이 품고 있는 그가 껌 한 통과 오만원 권을 내밀었다. 천원짜리로 거슬러 달라는 요청을 거부하자, 어버이 연합원이 내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 이 중 누가 손님인가?


본격적인 불만을 표하기 전에, 그는 오백 원 짜리 껌 한 통을 빌미로 나와의 상하관계를 명확히 해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 모르는 일이지요. 당장 내일이라도 선생의 가게에 소인이 객으로 갈 지도.


어버이 연합원은 가지런하지 못한 눈썹을 꿈틀했다. 그는 길 건너 월 칠십만원의 손해를 거두는 술집의 주인이었다. 게을러터져서 직접 은행갈 생각을 안하고 꼭 남 장사하는 데 와서 잔돈을 바꿔 간다고, 앞으로 절대 바꿔주지 말라고, 사장이 그랬다고, 점장이 그랬다.


- 자네의 사장과 나는 호형호제하는 막역지우이니, 이 뒷감당을 어찌하려 하는가?

- 상품 계산 외의 일은 사장님을 통해 말씀해 주십시오. 일곱 시진 후면 출근하실 것입니다.

- 선현의 말씀에 '과잉변설자필즉공산당원(過剩辯舌者必卽共産黨員 : 말 많으면 빨갱이)'라 하였나니, 바로 자네를 이르는 뜻이었음을 이제 알았네.


어버이 연합원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물러났다. 일곱 시진 후에도 다시 오지 않았다.


매장의 주력은 맥주였다. 잠들기 전 맥주 한 캔 비우는 것은 독신 백성들의 오랜 습속이었다. 특히 왜인들의 맥주가 인기였으나, 언젠가부터 왜국의 맥주를 마신자의 겨드랑에 세번째 팔이 돋아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아, 이제는 색목인의 맥주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북쪽 과잉변설자의 왕국을 지나 가없는 서쪽으로 수만리를 가면 색목인의 고향에 이르는데, 그곳에서 가져온 술로 색목인들은 삐루라고 부른다고 전임자는 말했었다. 전임자는 색목인의 나라로의 유학도 부질없어 취직이 안돼 편의점이나 한다고 한탄하며 퇴근 때마다 삐루 여러 개를 챙겨갔다.


자주보는 객 중에 늘 라면 먹는 작은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는 자가 있었다. 그가 오면 카운터에 묶여 다른 일을 못하기에 전혀 반갑지 않았으나, 그는 자신이 나와 친하다는 연유를 알 수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 늘 새벽일을 하니 힘이 부치겠소.

- 지난 번 감기에 걸린듯 했는데 몸은 좀 그만하시오?

- 홀로 매장을 지키니 두려움이 앞설 것이요, 두려움을 나눌 상대가 없는 외로움 또한 클 것이오.


늘 하나마나한 말을 던지며 책 읽을 정신을 분산시키는 단골은 취흥이 오르면 가왕의 시에 가락을 붙여 흥얼거리곤 했다.


그대가 돌아서면

두 눈이 마주칠까

심장이 덩기덕 쿵더러러러 두근대

들릴까봐 겁나


같은 행을 여덟번 째 읽다가 책을 덮었다. 한 대 때릴까. 내 안에 주먹이 잉잉 울었다. 사각 없이 배치된 네 대의 씨씨티비와 갚지 못한 핸드폰 요금을 생각하며 나는 치밀어오르는 열을 삼키듯 주먹의 울음을 달랬다.


묘시에 이르면 사위가 밝아졌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자들과 늦게 하루를 끝마치는 자들이 뒤섞였고 그들 사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잠 없는 노옹들이 막걸리를 사갔다. 노옹들은 흔히 막걸리를 가릴 검은 봉투를 달라했다. 그 세대 특유의 눈치와 부끄러움이 나는 가엾었다. 그들이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듯 세상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세상은 알았고 나도 알았으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사장은 잔소리와 함께 출근했다. 사장이 잔소리를 몰고오는 것인지 잔소리가 사장을 끌어오는 것인지, 혹은 사장과 잔소리는 구분되지 않는 온전한 하나인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공수의 예를 갖춰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퇴근이었다. 숙사에 돌아와 얕은 잠에 들면 편의점 문 열리는 종소리와 바코드 찍는 소리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와 사장의 잔소리가 내 마음 속에서 비벼졌다. 나는 자주 잠에서 깨었다. 숙사의 정동창을 지난 햇살이 깨어져 나갈 듯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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