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탈출기

1편

by 김바롬

나는 되도록 재미있는 글, 더 하자면 웃기는 글, 더더 욕심을 내자면 현웃이 나오는 글을 쓰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지금 쓰려는 글은 내가 써왔던 것 중 가장 재미없는 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누군가에게 읽히기보다는 스스로를 되돌아보려는, 비망록에 가까운 글이기 때문이다. 물론 재미없다는 것은 의도가 그렇다는 것이고, 그 결과물은 나의 의도를 조금이라도 배반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올해 첫번째 퇴사를 마친 이후 2달이 지났다. 그 사이 올해 두번째 입사와 퇴사가 있었다. 9월 말일, 10월을 코앞에 둔 지금 돌이켜보면 시간의 흐름과 내가 겪은 일들이 정확히 짝지어지지 않는다. 때때로 두번째 입사가 두번째 퇴사가 더 가까운 과거에 일어난 일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 시간 동안은 메모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감한 일이다. 그나마 플래너는 꼬박꼬박 써왔으나 반토막 난 듯한 기억력으로는 모든 잊지 않고자 하는 것들을 되살리기엔 역부족이다.


다행히 내겐 또다른 도구가 있다. 구글맵 어플의 타임라인 기능이다. 이것으로 지난 두 달 간의 내 동선을 알 수 있고 그럭저럭 내가 겪어왔던 일을 순서에 맞게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이 기능을 알게 되었을 때 개개인의 동선을 데이터화하다니 이것이야 말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구글의 음험한 야망의 결정적 증거라고 괜시리 분노했던 마음이 쑥스럽다. 뭐 하여간 구글의 야망이 음험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여름 휴가가 끝나고 8월 3일에 전직장, 아니 이제는 전전직장이 되어버린 곳에 가서 작별 인사를 했다. 사장은 나의 (자기 입장에선) 갑작스러운 퇴사 통보가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장은 외삼촌이기도 하기 때문에 나도 기분이 좋진 않았다. 지금 와서는 뭐 어쩌라고 싶다. 삼촌이 내게 섭섭할 권리가 있을 만큼 나에게도 그러한 권리가 있다. 난 딱히 나의 권리를 행사할 생각은 없지만 딱히 삼촌의 서운함에 영향을 받을 의무도 없다. 어찌됐든, 올 여름 나를 먹고 살게 해준 것은 사실이므로 이전과 달리 명절마다 안부 카톡 정도는 하기로 마음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올해를 통틀어 손꼽을만큼 기분이 좋았던 걸 상기하면 퇴사가 옳은 선택이긴 한 모양이다.


이후 2주간을 더 쉬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동선을 확인해보면 가끔 커피와 담배를 사러 나가는 것 외에는 산책조차 하지 않은 모양이다. 다른 시기에도 그랬듯 종종 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꿨다. 아버지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 나에게 패악을 부렸고 어머니는 내 편을 드는 날도 중립을 지키는 날도 있었지만 대게의 경우 아버지의 편을 들었다. 나는 내 나이의 절반 그리고 남은 것의 또 절반 이상을 잃은 것처럼 울었고 깨어나 아버지는 한참 전에 죽었음에 안도했다. 꿈이란 걸 알게 되면 울컥 울분이 치솟았다. 아버지보다는 아직도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나는 입술을 떨다가 지옥에나 떨어져라, 지옥에나 떨어져! 하고 외쳤다. 아직 반쯤은 잠결이어서 실제로 소리가 나게 외쳤는 지는 잘 모르겠다.


쉬었던 2주의 말미에 히포크라테스 이후 최고의 명의이신 송원장님을 찾아 뵈었다. 나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밝히고 약을 늘리면 좋겠다고 했다. 송원장은 지금은 약에 의지하기 보다는 스스로 스스로의 상태를 돌보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다. 지난 번과 같은 약을 쥐고 병원을 나서며 투덜거렸다. 순 돌팔이 아냐?


2주가 지나 새로운 곳으로 출근했다. 새로운 곳이라고 해야할까. 3년 전 관뒀던 바로 그 직장이었다. 나름 예비 유니콘 기업으로 잘 나갈 것만 같았던 그곳은 누군가에겐 갑작스럽겠지만 누군가에겐 예정됐던 그대로 고꾸라졌고 나는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다는 쥐처럼 빠져나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제는 이러나 저러나 상관 없는 일이니까 밝히는데 몇 달 더 일하며 깔끔한 마무리를 짓는 대신 실업수당을 받았다. 딱히 잘못 됐다 생각하진 않는다. 파견직과 비정규직을 오가게 하느라 받지 못한 퇴직금 대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엉망진창 내 인생을 감내하면서도 어쨌든 나는 파견직에서 정규직까지 가봤던 해피엔딩 장그래였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어차피 그곳에서 제안이 오지 않았더라도 삼촌의 공장은 관뒀을 것이다. 다만 그곳의 제안에 길게 고민했던 이유는 크게 세가지 정도인 듯 하다.


첫째로는 변해버린 회사의 모습이다. 난 50명 남짓일 때 입사해서 시리즈 a와 b의 달성을 지켜봤고 총무로서 200여 명의 입사와 100여명의 퇴사에 수반되는 업무를, 최종적으로 150여명의 업무 지원을 했고 이번 생에는 다시 겪고 싶지 않은 혼돈의 카오스였던 사무실 이전도 두 번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제법 행복한 시기였음을 이제야 시인한다. 이전이라면 해낼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과업들을 받았고 쉴 새 없이 쌍욕을 중얼거리면서도 결국 대부분을 해냈으며 차차 나의 역할을 인정 받았다. 알바를 전전하며 성과없는 글을 썼던 전후의 시기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제 20명 남짓한 인원이 남은 좁아터진 사무실은 죽은 고목 가지 끄트머리의 새싹처럼 희망적이었다기 보다 죽어가는 잉걸불처럼 비참하고 비루하며 또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도 내가 기억하는 사람도 극소수였고, 간간히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나를 기억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특히 곤혹스러웠다. 굳이 따진다면 그 때는 몰랐지만 다시 보니 얼굴이 붉어질 만큼 엉망진창인, 도무지 내가 썼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고등학생 시절 습작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실제 내가 느낀 감정과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먼 느낌이지만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최선일 듯 하다.


둘째로는 인간 관계로 인해 상처 받은 기억이다. 영화 <대부2>에 보면 알 파치노가 자신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던 형에게 넌 내 가슴을 찢어놨어. 내 가슴을 찢어놨다고! 하며 울부짖는 장면이 있다. 퇴사 직전 몇몇 친했던 동료들이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놨다. 물론 그들 중 남아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때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셋째로는 내게 감사한 제안을 준 그 상사에 관한 것이었다. 그쪽도 내게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그녀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이내믹한 변화가 있었고 그 고점과 저점의 차이가 상당히 컸다. 당사자들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큰 원인은 일종의 사내 정치였다. 전직장에 날 꽂아준 사람은 상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후엔 서로 오해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풀었다지만 각각 두 사람 밑에서 일해본 내가 보기엔 오해고 뭐고 일하는 스타일 자체가 서로가 서로의 로또와 같다. 그러니까, 지독하게 안 맞는다.


실제로는 어쨌든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숙적의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나는 특히 초반 몇 달 간 지독한 겐세이를 감수했고 이후로도 끝없이 나는 위험한 사람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상황은 차차 나아졌고 퇴사 이후로도 명절 안부 인사 정도는 하고 지냈지만 다시 함께 일한다는 것은 매우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뭐, 아무리 지독해도 전보단 낫지 않겠어? 어쨌든 일은 관뒀고 뭔가 하긴 해야 할테고 적당한 일이 없으면 쿠팡 물류센터라도 뛰어야 할텐데 못할 건 없었다. 나는 용감하게, 그리고 대책 없이 첫출근을 감행했다.


명치 맞다가 뺨 맞는 기분이었다. 물론 선택하라면 난 뺨을 맞겠지만 견딜만하거나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다. 이제는 그냥 내가 지고 가야할 운명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한 지병이 크게 요동쳤다. 이런저런 원인을, 특히 앞에 서술한 세가지 이유를 끌어올 수 있겠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문제는 내 피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 내 우울증의 진짜 원인은 신경전달물질의 교란이다. 다른 이유를 무궁무진하게 끌어올 수 있겠지만 신경전달물질의 교란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문제가 아니다. 내가 바로 선다면, 지금 문제로 여기는 모든 것들은 해결이 아니라 해소된다. 애초에 문제가 아닌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를 악물고 버티다 집에와서 펑펑 울었다. 죽고 싶지만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는 무조건 잠을 자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잠은 오지 않았고 전화 걸만한 사람들은 다둥이 육아에 치이거나 수술 후 장애를 얻어 대형 병원과 송사 중이거나 지난주 심장에 쇠붙이를 박아 넣었다.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도움을 청해보기로 하고 근처 병원 응급실에 전화했다. 한 곳은 정신과 입원은 되지 않았고 또다른 한 곳은 받지도 않았다. 나보다 힘든 사람이 많은가 싶었다.


하릴 없이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 자살예방상담 콜센터라는 것을 발견했다. 역시나, 상담자가 많다고 연락을 받지 않았다. 역시나 나보다 힘든 사람이 많은가 싶었다. 별로 위안이 되진 않았다. 안드로메다 은하 어딘가에 있는 불우 외계인 때문에 나의 기회를 빼앗겼다는 느낌이었다.


누워서 울다 분노하다 배겟잇을 잘근잘근 씹는 걸 세 번 쯤 반복하니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 뭐 별 달리 기대한건 아니었고 딱 예상했던 만큼이었다. 상담사는 솔루션을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고 들어주는 사람이니까. 몇 년 내로 ai에 대체되지 않을까?


그래도 덕분에 생각은 조금 정리 됐다. 밥벌이는 지엄한 일이지만 당장의 내 목숨보다 중한 건 아니다. 오늘은 무조건 자자. 내일 아침 일어나 아무일 없었다는 듯 출근해서 우선 이번주를 버티자. 그리고 이후엔 시원하게 관두고 다음달부터는 내 몸의 치유에 집중하자.


아침에 일어나니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어떨 땐 거꾸로 쥐고 칼등으로 썰어도 큰 차이를 못느낄만큼 무딘 나의 부엌칼을 칼갈이로 갈며 이걸로 팔을 그으면 출근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회사엔 오늘 못 나간다고 통보하고 화타 이후 최고의 명의이신 송원장님을 찾아갔다. 마침 그가 오후 출근 하는 날이라 세시간 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새로 받은 약은 가로 3센티 세로 4센티 정도 되는 작은 지퍼백에 들어있었다. 뭔가 불길한 생김새였다. 약을 받고 결제하는게 뭔가 은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 같았다. 이틀치였다. 그 이상 주면 한 번에 털어넣을까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사실 한 번 전과가 있긴 하다. 이틀을 내리 잤고 이후 고백하니 송원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다 내가 잘못되면 송원장 자신이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나참. 그에게는 수 많은 환자 중 한 명이겠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은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런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훗날 마침내 죽게되더라도 그렇게 죽지는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저녁, 안부 전화가 온 상사에게 퇴사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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