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탈출기 2

완?

by 김바롬

아무런 대책도 없이, 9월이 되었다.


첫날엔 지인이 동네로 와서 밥을 사줬다. 갈비탕에 이미 밥을 먹고 왔다는 지인의 김치찜 대부분까지 내 몫이었다. 특히나 김치찜은 고기가 가득한 옳게된 김치찜이었고 고기가 신선해서 야들야들했다. 세상에 이토록 맛있는게 많은데, 먹기만 잔뜩 먹고 가도 이득인 걸 왜 죽는단 말인가. 돌아오는 길엔 이래나 저래나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방치해 두었던 아토피 약을 타러 피부과에 들렀다.


5일이 되어, 원래 3일이었지만 대책없이 미뤘던 수면 클리닉에 갔다. 좀 어떠세요? 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잠이라도 잘 자서 다행이라고 했다. 다른 일이 있으신가요? 요새 내 상황에 대해 간단히 말했다. 원장님은 진심으로 걱정해주었다. 그녀는 이전 회사에서 잠깐 함께 일했던 재무 팀장을 닮았다. 아직도 은밀하게 자매가 아닌가 의심할 정도이다. 재무 팀장은 나로서는 까마득한 구름 위 봉우리처럼 보이는 엄청난 엘리트였는데 가끔은 순박하게 보였다. 자기 자신은 물론 태어나서 보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늘 잘난 사람이었을 테니까. 그런 그녀가 '소변은 지정된 장소에'라는 유치원생이나 들을 법한 당부를 듣는 40대 이상의 철없는 사내들이 일하는 공사판의 비루함을 알고 있을까? 내가 화타 이후 최고의 명의이신 송원장님을 제외한, 때론 그조차 포함해서 권위있는 사람들을 잘 믿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수면 클리닉 원장의 걱정도 다소 한가하고 소박하게 느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나의 베베꼬임에서 기인한 느낌임을 알고 있었기에 감사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곧바로 전직장에 갔다. 그냥 척만 해준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의 사정을 잘 이해해줬다.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렛뎀. 내버려두라. 내게 꽤나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다.


그 후 나흘 동안엔 단 한 번, 아마도 담배사러 나왔던 외출 외에는 집에만 있었다.


닷새째 되는 날 아는 형이 찾아왔다. 지나가다 들렀다고 뻥을 쳤다. 그의 차로 오랜만에 운전을 했다. 그러고보니 운전을 하면 스트레스 해소 효과가 있다는 얘길 들어본 적도 있는 것 같다. 예의 연구는 한국에서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매번 발로 걸었던 길을 차로 움직이다보니 이 나라가 정말이지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시민의식과 민도만 봐서는 당장 망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집에서 남쪽으로 시흥을 거쳐 다시 북으로 올라와 독산동 신길동을 거친 뒤 여의도에 가서 한참 동안 한강물을 들여다보다 왔다. 새삼 한강은 서울 시민의 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시 열흘 남짓 집에서 보냈다. 그래도 가끔 커피앤씨거렛 외의 목적을 가진 외출을 했다. 관악산엘 갔다. 그늘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멍하니 풍광을 훑으며 인생... 인생... 하고 중얼거렸다. 인생이 뭐? 쉽지 않다? 누구에게나 쉽지 않음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19일에 송정신과에 가서 약을 더 타왔고, 22일에는 평택 어머니를 보러갔다. 어머니의 발톱은 길게 자라 있었다. 눈과 허리가 안 좋은 어머니는 혼자 발톱을 깎지 못한다. 나는 가끔 쇼츠에 나오는 말발굽 깎아주는 장제사가 된 기분이었다. 그 다음날은 계동의 유명하다는 만두집에 아는 형의 청첩장을 받으러 갔다. 식날은 토요일이었다. 좋은 형이었고 아낌없이 축복하는 마음인 한 편, 난 이제 누구와도 특별한 관계를 맺지는 못하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그와 별개로 식장의 밥은 상당히 맛있었다. 아는 사람들은 각자 맡은 역할들이 있어서 밥을 혼자 먹었는데, 누군가 혼자 밥을 먹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해주는 것이 의아했다.


그리고 또 아무런 대책도 없이 10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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