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나약하지만
얼마 전 뉴스에서 대통령이 나오는 광고를 찍었다는 감독이 나왔다. 인터뷰에 익숙하지 않은지 보고 있는 사람이 가슴이 졸아들 지경의 중언부언한 인터뷰의 말미, 감독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지한 확신을 담아 말했다. 세상은 생각보다 나약하다. 부딪혀보라. 예상한 것보다 쉽게 부서질 수 있다. 뭐 대충 이런 맥락이었던 것 같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종류의 말이다. 물론 진심이며 좋은 마음으로 한 말임을 안다. 하지만 아무리 선의와 겸손이 몸에 진진하게 배어있는 사람이라 한들 저런 종류의 말은 근본적인 오만함을 가지지 않고 할 수 없는 말이다. 즉 이 복잡계, 똑같은 조건하에 똑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결과는 다를 수 있는 이 아인슈타인의 우주가 고전적 뉴턴식 우주라고 믿거나 믿는 척(양쪽 중 무엇이 더 나쁜지 모르겠다)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로또1등 당첨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꾸준히, 매주 로또를 사세요. 회의감을 단호히 거부하고 용기있게 앞으로 나아가세요. 분명히 돼요! 내가 해보니까 되던데? 일종의 생존자 편향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똑같이 해봤는데 안되더란 사람은 애초에 뉴스에 나와 인터뷰를 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어느 것이나 그렇듯 자기계발 분야에도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이 있으며, 그 중에서는 책 자체와 그 저자는 물론 그 책을 추천해준 사람에게까지 실망하게 되는(실화다) 책이 있는 반면 한 편으로는 그래도 극기하고 인내하며 잔소리를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태도의 책도 있다. 정확하다 말할 만큼 다독하진 않았으나, 후자의 경우엔 자신의 모든 말이 생존자 편향에 불과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워킹하지 않을 수 있음을 (그 가능성만이라도) 암시하는 태도를 가졌던 것 아닌가 한다.
예의 광고 감독은 (아마도 방송에 익숙치 않아 평소보다 훨씬 어리숙하게 나왔을 수도 있음을 감안해도) 딱히 달변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모두에게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행간에 암시했다고 나는 제멋대로 믿는다.
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로 한다. 세상은 정말 생각보다 나약할까? 세상의 어떤 나라는 10년 동안 두번의 대통령 탄핵을 하고 또 어떤 나라는 트럼프가 두 번 당선되는 걸 보면 그렇다고 느낄 수도 있을 듯 하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볼 수록 세상은 나약하다는 말은 옳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옳은 말이란 물리법칙처럼 어떤 조건에서든 옳은 말이지만 옳은 말이라고 해서 늘 맞는 말은 아니다. 누군가 호의로 베풀어준 김치가 짜다는 말은 염도 측정을 통해 옳은 말임을 증명할 수는 있겠지만, 호의를 베풀어준 이에게 하기엔 맞는 말이라고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옳지는 않지만 맞는 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은 결코 나약하지 않다. 설령 나약하다 한들, 우리는 그보다도 훨씬 나약하고 엉성하다. 세상은 나약하다는 말은 옳지 않다. 그러나 세상은 나약하단 말은 맞을 수도 있다. 세상은 나약하다는 말은, 사실이라기 보다는 이념에 가까워야 한다. 나약하다가 아니라 나약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만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해서, 다시 예의 광고감독의 발언으로 돌아가자면, 나는 그의 말을 긍정하기로 한다. 세상은 나약하다. 난 그것이 운좋게 좋은 성과를 거둔 이의 오만한 발언이 아닌 자신과 같은 행운을 갖지 못한 모두에게 전하는 응원이라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