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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Nov 27. 2020

허세탈출기

고맙지만 때리고 싶어

 스무살 보다 서른살이 가까운 시기에 이르러서도 난 술만 마시면 허세를 부렸다. 취할 수록 배가되는 나 자신의 초라함을 억누르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삶이 아닌 말로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는 것.


 당시 난 스스로 ‘구름 위의 성’이라 불렀던 달동네에 살았다. 고작 두어 살 어릴 뿐인 친구들을 앉혀놓고 몇시간 동안 온갖 허세를 부리다 흡족한 마음으로 귀가하다 보면 달동네를 오르는 동안 술이 깼다. 죽고 싶었다. 파란색 츄리닝을 입고 동네 조무래기들을 모아 허풍을 떠는 한심한 백수가 된 기분이었다.


 술을 끊을 수는 없으니 대신 허세라도 끊어야지. 굳게 다짐하고 고작 며칠 뒤, 나는 또 삶은 메추리알을 까며 술에 꼬인 혀로 말하는 것이다. 이해하겠니? 진정한 해학은 그 내면에 디오니소스를 품고 있다는 걸. 마치 이 메추리알에 들어있는 노른자처럼 말이야.


 속으로는 이 병신 또 육갑하네 했을지 몰라도, 내가 사는 술이라서 그런지 친구는 눈을 반짝이며 짐짓 감탄하곤 했다. 아아 형님...! 역시 형님...!


 한 번은 코 앞으로 다가온 연극 공연 연습하던 배우들 회식 자리에 꼽사리 껴서 술과 고기를 먹었다. 마침 앞에 앉은 비슷한 연배의 배우는 보잘 것 없는 수익과 불투명한 미래에 부모의 반대까지 고민이 많은 듯 했다. 입 다물고 있자. 스스로 그토록 다짐했건만 한 시간 뒤 두 병의 소주를 비운 나는 또 그를 붙들고 온갖 허세를 다 부리고 있었다.


 ...이해 돼요? 배우는 연기만 잘 하면 되는 거에요. 수익, 미래, 가족, 이런 걸 단번에 해결, 아니 해소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마스터 키는 바로 연기라는 거에요. 알겠어요? 배우는 윤리도 도덕도 없고 시발 애미애비도 없어요. 오직 연기만 잘 한다면 모든게 용서되는 거라고요. 고민을 하지 말고 연습을 해요. 알아들어요?


 배우는 눈을 반짝이지도 감탄을 하지도 않았다. 하긴 뭐 내가 사는 술도 아니었으니까. 열변을 토하느라 술이 좀 깨니 다시금 수치심이 밀려왔다. 하여간 그 날 자리는 그럭저럭 입을 봉한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며칠 후, 해당 공연 연출자였던 친구에게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대뜸 대체 걔한테 무슨 말을 한거냐고 노발대발이었다. 들어보니 그 배우가 회식 이후 이상해졌단다. 상대역을 자꾸 필요 이상으로 만진 탓에 여주인공이 울면서 도망가질 않나, 그 무례와 오만과 뻔뻔함에 남은 동료들도 학을 떼서 공연팀 자체가 와해 일보직전이란다.


 뭐 그런 새끼가 다 있어? 나름 공들였던 생애 최초의 대본으로 올라가는 공연이 뒤집어지게 생겼으니 나도 못지 않은 분노를 폭발시키며 욕설을 쏟아냈다. 야 임마, 네가 통제를 했어야지. 연출자잖아! 당연하죠. 방금 따로 불러서 대체 요새 왜 그러냐고 물어본 참이에요. 그러니까 뭐래?


 다음 순간, 나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작가님이 그랬데요. 배우는 윤리도 도덕도 필요없고 연기만 잘 하면 모든게 용서된다고.


 ......


 이상, 여지껏 술도 담배도 카페인도 못 끊고 있는 내가 그 못지 않은 향정신성약물 ‘허세’를 끊은 경험담이다. 뭐 아직도 술만 마시면 금단현상으로 입술에 경련이 일어나지만. 어쩌면 날 깨우치게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는지도 모를 예의 배우를 이제는 용서하고 감사하는 마음이다.


 ...근데 심지어 넌 연기도 못 했잖아 개쌍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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