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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Dec 29. 2020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누가 노조 가입할 지 안 가입할 지

 고등학생 시절 윤리 선생은 꽤나 별난 인간이었다. 전형적인 운동권 출신으로, 하루 세 갑의 담배를 피워 없애는 헤비스모커였고 그게 다 교육세 납부를 위한 것이라 합리화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교육세를 납부하는 것은 용납치 않아서 매 쉬는 시간이면 운 없는 애들이 그에게 멱살을 잡혀 화장실에서 끌려나오곤 했다.


 어울리게도 전교조 소속이었고 비록 낙선의 아픔을 겪었으나 서울 지부장으로 출마해 제법 많은 지지율을 얻기도 했다. 난 아직도 교무실에 심부름 갔다가 우연히 본 그의 선거 홍보 포스터를 잊을 수 없다. 사진 속의 그는 더없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늘 이 잘못된 세상에 대한 체념어린 분노로 벌레씹은 표정을 하고 있던 수업 중과 다르게 말이다.


 그의 수업에 대한 불편함은 아직 어린 나로선 명확히 표현할 수 없었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직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은 소년들을 대상으로 하기엔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편향된 교육’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듯 하다.


 게다가 헤비-스모커 답게 지독한 구취를 풍겨서, 가장 앞자리였던 내겐 더욱더 곤욕이었다.


 그가 수업시간 중 떠들어대던 운동권 시절 ‘날리던’ 무용담, 자본가와 권력자를 향한 바닥 없는 분노,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비판 등은 이제 흐릿해져 기억나지 않는다.


 딱 한가지, 그의 장광설 중 유일하게 기억에 남아있고 동시에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썰이 있다.


 그가 청춘을 바쳤던 운동권 생활을 마무리하고 교사가 되기 전, 한창 취업을 시도할 때의 얘기다. 운이 좋았는지 당시 이름 높던 대기업 최종면접에 올랐다. 말이 최종면접이지 실질적인 합격자 일곱명을 대상으로 하는 마지막 요식 행사쯤 되는 거였나보다. 헌데, 최선임 면접관으로 보이는 작자가 구직자들을 한 명 한명 가리키며 묻더라는 것이다. ‘노조 가입 할 겁니까?’


 물론 모두가 탄저균이라도 만진듯 기겁하여 몸을 빼며 양손을 내저었다. 마지막으로 같은 질문을 받은, 왕년의 운동권 스타이자 훗날 담배쟁이 윤리선생이 될 그만 제외하고 말이다.


 ‘노조 가입은 노동자의 권리이자 의무로 알고있는데요.’


 급속 냉각된 분위기를 와장창 깨뜨리며, 최선임 면접관은 뜻밖에 호탕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단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손아귀에 쥔 권력자 앞에서도 당당히 노동자의 권리를 상기시킨 패기의 젊은이를 크게 칭찬하는 동시에, 노조가입을 부정한 다른 구직자들에게 벽력 같이 호통쳤다. ‘늬들은 다 쓰레기 새끼들이야!’


 그리고 면접 결과는... 짐작대로다. 여섯 명의 쓰레기는 당당히 합격했고, 선생 혼자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다. 훗날 전교조 서울지부장 낙선의 상처보다야 덜 쓰라렸겠지만 말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엄밀히 말하면 비호감이었던 예의 윤리 선생이 그 순간만큼은 2002 월드컵 이탈리아전의 안정환보다도 멋져보였다. 숫제 질색하던 구취와 거슬리는 목소리마져 쇠락한 영웅의 상처처럼 느끼질 지경이었다. 세상에, 저 인간이 이토록 멋진 인간이었다니!


 어찌나 감명 깊었는지, 난 그 날 저녁 가족과 밥을 먹다 (당시엔 비교적 정상인에 가까웠던) 아비에게 상기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아비의 반응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났다. 깊은 울림의 감탄사와 함께 자신의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몰라 한동안 침묵하는 대신, 코웃음치며 선생을 조롱했다. 세상을, 회사를, 하다 못해 상대방 한 명조차 변화시키지 못할 덧없는 신념을 굳이 입에 담아 대기업 입사의 기회를 날려버린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난 큰 실망을 넘어 분노마저 느꼈다. 아직 어린 나로선 그 실망과 분노를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동의한다 해도, 적어도 아버지라면 절대 자식에게 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어느 초등교사가 학생들에게 ‘세상에 산타클로스는 없다’는 발언을 했다가 해고 당했다고 한다. 당사자는 억울할 지 모르지만 난 정당하다고 본다. 옳은 말이라고 해서 다 맞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무살을 넘겼다면 대부분 인정하겠지만 세상은 불의와 불합리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보통 부모가 아니라 세상이 직접 가르쳐줬을 게다. 아직 세상에 나서지 않은 소년에게 부모가 해줘야하는 말은 정의와 합리와 윤리와 도덕이 아닌가. 설령 그것이 산타클로스 만큼이나 덧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 때로부터 십수 년이 지나고 나도 그저그런 어른이 됐다. 여전히 세상은 불의와 불합리로 가득차 있고 보통 이기적으로 구는 인간이 이타적인 인간보다 이득을 보며 산다. 그리고 나 또한 가끔은 그런 흐름에 은근슬쩍 올라타 모르는척 자질구레한 불의와 불합리에 기여했음을 부정하진 못하겠다.


 어차피 이왕에 버린 몸 일단은 살아볼 참이지만, 한가지만은 지키고자 한다. 비록 용기가 없어 올바른 일을 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올바른 일을 하는 이에게 냉소를 보내진 않겠다는 것.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 넌 뭐가 다른 줄 아냐고 비난하는 대신, 내 부끄러움을 묵묵히 견디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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