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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Feb 09. 2021

조지 아저씨는 이미 다 알고 있었네

무려 70여 년 전에

 지구평면론자부터 백신무용론자에 안아키까지. 요새는 반지성주의가 유행인가보다. 뭐 그에 대해 새삼 부정적인 의견을 줄줄이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첫째로 내가 반지성주의를 경멸할 만큼 지성인이 아닐 뿐더러, 둘째로 반지성주의는 결코 맨땅에서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즉 배운놈들 특유의 엘리트주의를 발판삼아 발생한다는 것이다.


 내가 영화 평론가라는 칭호로 활동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싫어하는 이유도 그렇다. 본래 예술은 늙을 수록 대중성과 작품성이 괴리되기 마련이라지만, 가장 젊으면서도 현대 인류 문명에서 가장 가능성 많은 예술 장르인 영화에서 조차 그 괴리가 날마다 커지는 것은, 본래 대중성과 작품성의 간극을 봉합하는데 힘써야할 평론가들의 오만한 스노비즘에서 기인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따로 물어보면 정색을 하며 부정하겠지만, 그들을 붙잡아다 주리를 틀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병행하면 사흘 안에 자신의 진심을 순순히 실토하리라.


 그러나 벌써 재작년이 되어버린 때, 후에 외국의 권위 높은 상을 수상하며 유명해진 모 영화에 대한 모 평론가의 평가가 받았던 반응은 매우 부당하게 보였다. 해당 평론가는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고 했는데, 이를 두고 명료와 제작으로 쉽게 쓰면 될걸 괜히 어렵게 쓰는 허세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일부의 반응이라고 하지만, 내겐 그조차 놀라울 따름이었다. 명징이나 직조란 단어가 특별히 어려운 단어인지는 사람마다 다를테니 뭐라 할 말은 없다. 다만 그들과 같은 의견을 가진 이들을 위해 나는 어느 유명 작가가 창안한 한가지 언어 형태를 제안하고자 한다.


 - ...우리의 주된 임무가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내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네. 우리는 매일 수십, 수백 개의 낱말을 없애고 있지. 말하자면 우리는 말을 뼈만 남도록 잘라내고 있는 셈일세. 도대체 한 낱말이 단순히 다른 낱말의 반대만을 뜻한다면 굳이 있어야 할 필요가 뭐 있겠나? 한 낱말에는 이미 그 자체에 반대로 말할 수 있는 요소가 포함돼 있네. ‘좋은’이라는 낱말을 예로 든다면, 그 반대말은 ‘안 좋은’이라고 하면 되지. 철자도 생판 다른 ‘나쁜’이란 말이 뭣 때문에 따로 필요하겠나? ‘좋은’이란 말의 뜻을 더욱 강조하고 싶은 때도 마찬가지네. ‘탁월한’이니 ‘훌륭한’ 같은 모호하고 쓸모도 없는 말들이 수두룩하게 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 좋은’이라는 말이면 충분하고, 이걸 더욱 강조하고 싶으면 ‘더욱더 좋은’이라고 하면 될 것이네. 그러니까 좋고 나쁘다는 전체적인 개념은 (‘더욱더 좋은’부터 ‘더욱더 안 좋은’까지) 여섯 개의 낱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얘기지. 어때, 멋지지 않나?


 ...짐작 하시다시피, 이것은 조지 오웰이 그린 디스토피아의 공용어 신어에 대한 설명이다. 친절한 조지 오웰 선생은 곧이어 저 언어적 반지성주의자들의 목적에 대해서도 밝힌다.


 - 신어를 만든 목적은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네. 세월이 흐를 수록 낱말 수는 줄어들고, 그에 따라 의식의 폭도 좁아지게 되는 거지. 구어에 대한 지식은 모두 사라질 걸세. 과거의 모든 문학도 없어질 거고. 모든 사상적 분위기도 달라질 것이네. 사실상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사상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걸세.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게 될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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