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아니라 자존심이
간혹 ‘호주 갔다왔으면 영어 잘 하겠네?’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시드니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심한 목감기에 걸렸다. 아직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나, 당장 죽게될 지경이었으니 당시 거주하던 차이나 타운의 약국을 찾아갔다.
아시안 약사를 마주하고 한참을 어, 음... 오우... 하고 감탄사만 내뱉던 나는 급기야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최민식이 기침하는 줄 알았을 법한 실감나는 기침연기였다.
- 콜록콜록! 으, 으으... 콜록! 아햅투매니코웊흐. 으아, 으아아아! 암시크! 페인풀!
발음이 시원찮아서인지 연기가 성에차지 않았는지, 약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난 저 유명한 개리 올드만이 레옹에서 약빠는 장면을 연상 시킬법한 신들린 연기를 선보였다.
- 콜록콜록콜록콜록! 으아아, 마이넥! 페인풀, 페인풀! 암필링페인풀!
- ......
- 으아아, 으아아아! 페인풀!
- ...기침약 드려요?
- 아, 네.
- 이거, 하루 세 번 드세요. 17불 입니다.
- 아, 네. 감사합니다.
- 안녕히 가세요.
후로도 ‘캐나겟살몬런치뽁쓰?’라는 말에 ‘아, 연어요?’라거나 ‘아메이드템페스트인마또일렛.’하는 말에 ‘아, 배탈약이요?’하는 대답을 듣는 걸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스트라쓰 필드... 아니, ‘츄롸스 ㅍ휠’은 차이나 타운으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한인들이 더 많아진 동네라는 걸 알았다.
본격적으로 영어 실력을 늘린 것은 이후 타즈매니아에 간 이후인데, 자세한 내용은 졸저 ‘나는 작가입니다, 밥벌이는 따로 하지만’을 참고해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