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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Feb 19. 2021

가난한 사람들

가난이 힘든게 아니라

 일전에 언급한 청소년 교육용 게임을 진행했을 때의 일이다. 흔히 뉴스로나 접하는 ‘요즘 애들’에 대한 흉흉한 평가와 달리 아이들은 하나같이 순수하고 착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내게 소지섭 닮았다는 싫지 않은 거짓말을 할만큼 몰입하기도 했고.


 대부분은 게임을 플레이하는데 필요한 아이패드를 받는 것만으로도 좋아했다. 학생 때는 접하기 힘든 물건일 테니까. 나도 익히 아는 ‘대애박’은 이미 흘러간 옛 유행어가 된 모양이고, 그 뜻은 알 수 없으나 요샌 ‘레게노’란 감탄사가 그 자리를 차지한 모양이다.


 헌데, 그 중 한 아이가 내게 큰 충격을 줬다. 발랄하게 재잘거리며 벌써 이것저것 눌러보는 친구들과 달리, 한참을 아이패드의 꺼진 액정만 조용히 만지작거리다 말했던 것이다. 이거 망가지면 물어내야 돼요? 그럼 안 할래요.


 충격과 함께 마음이 아팠다. 파손 보험이 있다는 사실이나 지금껏 직원은 몰라도 학생이 파손한 경우는 없었다는 건 둘째치고라도, 인생을 20년도 안 살아온 어린 아이가 접하기 힘든 물건을 쥐고 흥분과 기대감에 젖는 대신 그런 종류의 걱정을 하고 있다니. 그게 아이 탓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어른들이겠지. 애 앞에서 돈 얘기를 얼마나 많이 했으면.


 도스토옙스키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에 나오듯, 가난한 사람을 진정 힘들게 하는 건 가난 그 자체가 아니다. 가난은 사람을 비굴하게 하고, 주눅들게 하고, 운신의 폭을 좁히고, 사고를 틀어막고, 종내는 희망마저 말라 비틀어지게 한다. 몸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면역체계를 무너뜨리는 에이즈처럼 말이다.


 흔히 부의 불평등을 옹호하는 연구의 결과를 봐도 그렇다. 보통 인지능력 검사를 하면 부자들은 높은 점수를, 가난한 사람들은 낮은 점수를 받기 쉬운데, 이것은 유전적 요인이 아니라 가난이, 정확히는 가난이 가져오는 병든 마음이 인지능력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금 이상으로 내 인지능력이 저하돼있던 순간이 스무살 아무 준비 없이 집을 나와버렸을 때일 게다. 사람은 2주 정도를 굶어도 견딜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시기였다. 하루는 너무 배고파서 귀에 끼고 있던 귀고리를 빼서 금은방에 갔다. 금은방 주인은 황당하다는 듯 무게를 달더니 5000원을 내줬다. 쇳독이 있어서 금 귀고리 아니면 끼울 수 없었던 나의 몸뚱이를, 그리고 한 귀에 구멍을 두개씩 뚫은 치기어린 결정을 그 순간만큼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뭐, 꼭 옛이야기로 치부할 처지는 아니다. 시국이 정수리 위에 닿아 찰랑거리는 동안 내려진 동앗줄 같았던 채용 공고에 지원한 이후 내 마음을 지배했던 건 저 가난한 사람들 특유의 비굴함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난 열심히 해서 꼭 붙어야지, 라든가 하다 못 해 떨어지면 그 다음은 어쩌지? 하는 걱정조차 하지 않았다. 면접을 보게 되면 정장을 장만해야 할텐데 돈만 쓰고 면접은 떨어지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던 것이다.




 물론, 서류에서 광탈한 지금에야 이러나 저러나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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