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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Feb 23. 2021

롱 리브 더 퀸

이미 충분한 것 같기도 하지만

 시드니 중식당에서 일할 때다. 비교적 역사가 짧아서 그런지 별의별 구실을 갖다붙인 명절을 지냈는데, 그 중 하나가 퀸즈 버-ㄹ쓰데이, 즉 여왕 생일이었다. 빨간날엔 늘 그렇듯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았다. 이것을 도리어 기회로 보는 한인 식당만 악착 같이 영업할 뿐이었다.


 반경 수 킬로미터 내에 문을 연 식당이라곤 예의 중식집 뿐이었다. 평소 한인 일색이었던 홀에 수 많은 인종들이 모여 그들에겐 낯선 음식을 먹었다. 가지각색의 언어와 피부색과 생김새를 가진 이들이 딱히 질이 좋다고 할 수 없는 면요리를 서툰 젓가락질로 집어먹는 모습이 마치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한 장면 같았다.


 다신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날이었다. 이전에도 이후로도 그 정도 강도의 일은 해본 적이 없다. 그릇 닦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빨랐고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면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담배는 꿈같은 얘기였고 직원식사조차 어불성설이라 틈틈히 잘 못 나간 짜장면을 주워먹으며 버텨야 했다.


 해가 지고 달이 떠도 업무강도는 주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영혼이 탈탈털려 빈 껍데기로 간신히 일하던 직원들의 불평이 진지하고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허나 그 욕설의 대상은 노동법의 사각에 위치한 이민자 타운이나 사장의 탐욕도 낯선 음식에 기상천외한 클레임을 걸어대는 뜨내기 손님들도 아니고, 다름 아닌 영국 여왕이었다.


 들어보니 여왕 탄신일은 여왕 생일이 아니란다. 즉 여왕의 생물학적 생일은 따로 있고, 퀸즈 버-ㄹ쓰데이란 모든 연연방 국가가 공식적으로 축하하는 그냥 기념일이라는 것이다. 지까짓게 뭔데? 무슨 예수나 석가모니도 아니면서. 지가 뭐라고 생일상을 일 년에 두 번이나 받아서 이 고생을 하게 만들어? (단어의 갈피마다 다채로운 비속어가 덧붙었지만 검열했음을 밝혀둔다)


 숫제 눈 앞에 여왕이라도 행차하면 그대로 목을 졸라버릴 기세였다. 나 또한 끝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맞장구를 시작했다. 온갖 어휘를 끼워맞춰 여왕을 비난하다 보니 어느새 마감이었다. 그녀에 대한 욕설이 일을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해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기억이다. 어쩜 그렇게 조금만 어긋나도 불평불만이 흐드러졌는지. 어찌됐든 날 먹여살리는 일에 대한 예의가 없었는지. 애초에 누가 잘못한 상황도 아니었지만, 설령 누군가 욕을 먹어야만 했다한들 그 대상이 절대 여왕은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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