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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Jun 29. 2022

높은 분은 간이 세다

벌거벗은 임원님

 카드사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어느 연말에 전사 대상 회식을 했다. 참석자 대부분은 (물론 우리 모두 다같이 동료라고는 하는데) 평소엔 대면도 소통도 할 일 없는 이들이었고, 그들이 한해의 성과를 자화자찬하는 동안 나를 비롯한 비정규직은 남의 집 잔치일을 거들고 개다리 소반을 받은 옆동네 몸종처럼 접시에 얼굴만 처박고 있을 뿐이었다. 워낙 음식에 집중하고 있어 시작하고도 한참을 지나서 알았는데, 사회자가 흥을 돋우기 위해 부서별 대표를 모아 게임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종목은 팔씨름이었다. 그게 실수였다. 계약직 부서엔 야수가 있었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쇠사슬로 칭칭 감아 옆방에 가둬두었지만 씨근거리는 숨소리와 때때로 건물이 뒤흔들리는 포효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라고 뻥을 쳐도 좋을 구척장신의 장사였다.


 구척장사는 팔씨름 토너먼트에 참석해 모든 경기를 2초 안에 끝내는 기염을 토했다. 우리는 그가 일 할 때 보여주는 그 엄청난 힘이 실은 매우 자제한 것임을 깨달았고, 이미 충분히 그러고 있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각별히 신경써서 심기를 거스르지 말아야겠다 다짐했다.


 마침내 마지막 경기를 끝내고 최종 우승 상품이었던 양주세트를 수령하려는 구척장사가 드물게도 만면에 미소를 짓는 순간, 누군가 난입하여 쩌렁쩌렁 외쳤다.


 - 나랑도 한 번 해보지!


 웬 술취한 아저씨가 주정을 부린다고 생각한 나는 일순 행사장을 휩쓴 긴장감에 어리둥절했다. 그는 본부장이라고 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도 했다. 일순 몸이 굳는 우리 부장을 봤을 때 크게 틀린 말은 아닌 듯 했다.


 본부장은 물론하게도 우리 구척장신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제법 굵은 팔뚝을 드러내며 팔씨름대에 팔꿈치를 올렸다. 어딘지 모르게 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구척장신은 상품으로 받은 양주를 소중하게 내려놓고 착석했다.


 그렇게 시작된 마지막 경기는 그 이전 모든 경기 시간을 합친 것만큼 길었다. 즉, 8초 정도 걸렸다. 다들 꽤 당황한 듯 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부족정 시대도 아닌데 본부장이 본부장인 이유가 힘이 제일 세서는 아닐 터였다. 하여간 본부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신호라도 된듯 모두가 환호했다.


 쉽게 이길 수 있음에도 제법 각축을 벌인 듯 시간을 끈 것도 그렇고, 어쩐지 아까보다 훨씬 호들갑스러운 사회자의 인터뷰에 가장 힘들었던 상대로 본부장을 꼽은 것도 그렇고, 난 구척장사가 꽤 까다로운 문제에 '간이 맞는' 적절한 선택을 했다고 느꼈다. 주말을 보내고 다시 월요일 아침 회의 시간, 주말 근무의 피로함 때문만은 아닌 초췌한 얼굴의 부장이 말하기 전까진 말이다.


 - ...좀 져주지 그랬냐.


 아아, 그제야 알았다.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그것은 결코 적절하지 않았구나. 오히려 부족했구나. 고작 그 정도로는 불안할 수 밖에 없었구나. 연극 배우처럼 과장되고 부담스러운, 무대에서나 적합한 톤이 그들에겐 일상이어야 하는 구나. 그제야 안심하고 믿어버리는구나. 가장 힘이 세서 그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닌 본부장을 힘으로 이겨버리는 건, 마치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웃어버리는 아이처럼 철 없는 짓이었구나.


 높은 분은 간이 세다. 수 년이 지나고 이후로는 팔자에 영영 없을 줄 알았던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입맛들은 여전하다. 나는 오늘도 높은 분들께 열심히 손바닥을 비비고(뒤늦었지만 뜻밖에 재능을 발견한 듯 하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음식이라면 너무 조미료를 쏟아부어서 원재료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을만한 걸 맛나게 쳐잡수시는 것이다.


 어딜가나 사방팔방에서 저염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정신적 저염식에 대해선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이제는 흘러가버린 엘리베이터 걸이나, 114 직원, 혹은 스튜어디스의 짜디짠 친절은 비단 그들의 의지는 아닐 터이다. 우리 모두 너무 짜게 먹고 있진 않은 지 생각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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