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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Sep 01. 2020

1994년 어느 늦은 밤

조리장님이 해주신 옛 이야기

 편모슬하에서 자란 그녀는 학생 때부터 돈을 벌어야 했다. 방배동 카페 골목. 제임스 딘 간판 그림자 지는 자리의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끔 와서 이런저런 바보 같은 질문만 하다가 그녀가 골라준 옷을 사가던 여덟 살 연상의 남자에게 고백을 받아 첫 연애를 했다.


 친구들 대부분은 연애 경험이 없거나 또래의 남자들을 만날 뿐이었기에, 어엿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가용을 끌고 다니는 진짜 '어른'과 사귀는 그녀의 연애에 큰 심을 보였다. 그리고 당시로써는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나이의 남자가 곧 속궁합의 확인을 요구할 것이라 입을 모았다. 그녀는 미쳤냐며 친구의 팔을 찰싹 때렸지만 자꾸 듣다보니 마음의 준비를 하긴 해야겠구나, 싶었다.


 함께 맞을 두번째 크리스마스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을 때, 늘 과묵하고 멋대가리 없던 남자는 처음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이번에도 첫번째 크리스마스 때처럼 저녁만 먹고 돌아갈 것이냐 물었다. 친구들이 일러준 것 그대로였다. 그녀는 짐짓 새침하게 그럼 밥먹고 술도 한 잔 마시자고 생색을 냈다.


 그 날 밤 그녀는 밤새 모종의 준비를 해야했다. 짝 맞는 속옷과 아껴 뿌리던 향수와 제임스 딘 옆집에서 일할 때 직원가로 구매했던, 그러나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원피스 등. 콩닥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겨울의 늦은 해가 뜨자마자 집 근처 목욕탕에 갔다. 세시간 후, 발갛게 익은 얼굴로 집에 돌아온 그녀는 두시간 째 그녀를 기다리던 남자와 마주쳤다.


 그녀를 데리고 교외로 드라이브 갈 계획을 (홀로) 세우고 아침 일찍 찾아왔던 남자는 노발대발했다. 분명 전날 저녁 집 앞까지 데려다줬는데, 집에 가지 않고 어딘가에서 밤을 새우고 온 것이라 믿는 듯 했다.


 물론 부정했지만 그렇다면 이른 시간에 어딜 다녀온 거냐는 질문에는 말문이 막혔다. 갓 스물의 등신같은 (그녀 자신의 표현이다) 소녀였던 그녀는 도저히 '당신히 요구할지도 모르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 아침 일찍 목욕탕을 다녀왔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각자 계획했던 크리스마스 일정은 엉망이 됐고 둘은 늦은 오후까지 싸움을 이어갔다. 결국 남자는 이별을 언급했다. 덜컥 겁을 집어먹은 그녀는 가방 속에 숨겨놨던 젖은 목욕용품을 꺼내들었다. 남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설명하려 했지만 그녀는 아직도 자기 방 침대 위에 놓여있을 짝맞는 속옷과 향수와 원피스를 떠올리며 자꾸만 서러워서 눈물만 뚝뚝 흘렸고, 결국 대성통곡을 했다.


 결국 진상을 알게 된 남자는 아주 오랫동안 웃었다고 한다.




 그 밤이 다 새도록.




 이상, 언젠가 멜번의 식당, 곧 퇴근할 아내를 모시러 온 남자가 매장 구석에서 비빔밥을 먹는 동안 그녀, 즉 조리장님이 해주신 옛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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