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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Aug 24. 2020

쿡새끼와 뒤틀린 황천의 손예진

너무 오래 상상했을 때

 멜번의 식당 주방에서 일할 때다. 함께 일하는 동료 중 여지껏 기억에 남는 이가 있었다. 홀직원과 키친핸드를 거쳐 최종적으로 쿡을 했지만 어느 위치에서든 욕을 먹었다. 다만 직원 중 그를 진심으로 미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루 세 번 넘게 한 달이면 백 번 사고를 치는 그에게 자신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능력은 큰 축복이었다. 물론 나 또한 그를 유쾌한 동료로 여길 뿐 미워하진 않았다. 나는 그를 쿡 중에 막내라는 의미로 쿡새끼라고 불렀다.


 쿡새끼는 근무 첫 날, 홀에서 일하다 사수에게 멱살을 잡혀 크게 싸운 후 주방으로 왔다. 사수는 흔히 말하는 보통이 아닌 성격이었다. 다소 억울하게나마 연예인 누구를 닮은 예쁜 얼굴에 영어 발음도 좋고 일도 잘했지만 손님과 자주 싸워 사장은 그녀를 싫어했다.


 반나절만에 키친 핸드로 보직 변경된 쿡새끼는 뭐 저런 게 다 있냐고 노발대발이었다. 난 그의 속터지는 설거지 속도를 보며 그럴만도 하다 싶었지만, 직원끼리 싸우고도 잘리지 않을만큼 일손이 아쉬운 상황임을 알았기에 묵묵히 그를 달래기만 했다.


 돌이켜보면 그 때 그는 마음속으로 내 멱살을 잡은 건 네가 처음이야 어쩌고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 한계절이 지나도록 쿡새끼는 자신의 첫 사수(이하 뒤틀린 황천의 손예진)에게 끈덕지게 구애했다.


 2, 3호점 직원들까지 모인 전체 회식에서 고백을 했다가 공개적으로 까인 사실이 지역 교민 신문에 오른 이후에도 쿡새끼는 마음을 꺾지 않았다. 전술했듯 일은 더럽게 못해도 인망은 좋은 그를 조리장 이모는 팍팍 밀어줬다. 실력보다는 남은 비자 기간이 길다는 이유로 쿡으로 올라간 쿡새끼를 평소엔 그렇게 혼내고 꾸짖으면서도, 그가 쉬는 날이면 이모의 칭찬이 떠르르했다.


 다 필요없고 남자는 착한 게 최고야. 단점은 고쳐쓰면 되지만 못 돼 처먹은 건 고치지 못하는 거야. 안 그러니? 오랜만에 직원 식사로 나온 순두부찌개를 부지런히 흡입하다 옆구리를 찔린 나는 화들짝 놀라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남자는 그 친구처럼... 어, 그, 순두부 뚝빼기 같아야죠. 천천히 뜨거워지고 오래가는. 오빠 근데 걔는 거의 양은냄비 아니에요? 그야 네가 멱살... 아니, 진심인가보지. 원래 당사자들 빼고는 딱 알잖아. 진심인지 장난인지. 그런데 젓가락으로 삿대질 하진 말아줄래?


 그리고 며칠 후였다. 절대 유독 배가 고픈 오픈 준비 시간이라서가 아니라, 그게 핸드로서의 의무였기 때문에 매일 아침 나는 그 날의 밑반찬을 한 입씩 맛보곤 했다. 그 날도 유독 윤기가 자르르한 감자 조림을 입에 털어넣었다. 주 고객층인 중국인의 입맛에 맞춘 달콤함이 평소보다 깊고 진했다. 혀 위에서 다디단 플라멩코를 추던 감자가 비단물처럼 목으로 넘어갔다.


 이모 맛보시고 욕먹기 전에 빨리 다시 하라고 귀띔해 준적은 많았지만, 그렇게 감탄할 정도로 뛰어난 맛인 건 처음이었기에 깜짝 놀라 쿡새끼를 돌아보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불판을 청소하는 그의 허리 뒤춤에 빤쓰 밴드가 살풋 삐져나와 있었다. 빨래를 귀찮아해 갈아 입을 게 없으면 빤쓰대신 수영복을 입고 출근하기도 하던 그가 그 날따라 선명한 빨간색 빤쓰를 입고 있었다. 난 그 밴드에 새겨진 미찌꼬 런던이라는 글자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더니, 상태 메시지로 변하는 기적을 보았다. 지금은 연애 중.


 워홀러의 사랑이란 워낙 짧고 강렬하기 마련이지만, 그 후 쿡새끼와 뒤틀린 황천의 손예진은 유독 알콩달콩 깨가 쏟아졌다. 그들의 애정행각이 얼마나 눈 시려운지 그들을 밀어줬던 이모조차 후회하는 듯 했다.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은, 얼마 전에 나 삿대질 하던 젓가락으로 내가 노리던 마지막 제육 조각을 집어 쿡새끼 입에 넣어주는 뒤틀린 황천의 손예진의 화사한 미소와 쿡새끼의 비단 부끄러움 때문만은 아닌 난감한 표정이다. 피구애자는 그제야 시작이었지만, 머릿속으론 수백번 만남부터 이별까지 시뮬레이션 했을 구애자에게 그 순간은 쓸데없이 긴 에필로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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