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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Apr 11. 2023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춘다면

 이제와선 딱히 유감스러울 것도 없지만 내겐 음악적 소양이랄게 없다. 창작은 꿈도 꾸지 않지만 향유에도 영향을 미치는 수준이라, 딱히 음악을 듣고 즐기는 취미가 없어 누가 좋아하는 음악을 묻는다면 '침묵'이라 답하는 지경이다. 그러나 나 또한 아주 가끔씩은 뜻하지 않게 낯선 음악이 고막에 창촉처럼 박혀 온몸이 아픈듯이 느끼는 순간이 없지 않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와 같은 곡이 그랬다.


 아마도 생전 처음 들어본 곡은 아니었을 텐데, 나는 오르페우스에게 인류 최초로 음악이라는 걸 들어본 고대의 야만인처럼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막걸리 몇 주전자 걸친 듯한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운 탁성이 읊는 가사가, 진부한 표현을 용서받을 수 있다면 정말이지 '영혼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절명시라고 느낀다. 남긴 뒤 죽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살아가는 종류의 절명시. 뭐 하긴 어차피 결국은 모두 죽지 않는가. 죽겠다고, 그러나 계속 살아간 끝에 죽겠다고 말하는 것은 절망의 끝을 맛본 사람만이 노래할 자격있는 희망이었다.


 전 직장의 '탁월한 업무 능력을 가진' 팀장님은 작가 싸인본 책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는데, 십 수 년 전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자기 수집품 중 한 권의 저자를 알아보고 정중히 인사했다고 한다. 혹시, 한대수 선생님 아니십니까? 한 세대를 채우고도 몇 년 남는 나이 차이에도 두 사람은 인연을 이어갔고, 한 번은 집에 초대 받아 식사도 했다고 하니 꽤나 친밀했나보다.


 난 다음에 그 분을 뵙게 되면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마도 여러 번 들으셨겠지만, 또 하나의 청춘이 당신의 노래를 듣고 인생의 한 국면을 다시 넘어설 수 있었노라고. 팀장은 인연이 끊긴지 몇 년이 됐다고 아쉬워했다. 난 아쉽지는 않았다. '실제로' 전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차피 팀장은 내 말이라면 개콧구녕으로 아는 양반이기도 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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