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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롬 Jun 01. 2023

정치적 단정

가까이서 봐도 희극

 외주 준 사상을 재구축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상의 교조화를 일으킨다. 부처가 위대한 철학자로, 예수가 시대를 앞선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로 기억되기 보다 종교의 창시자로 인식되는 것은 아마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모든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은 반복되어 나타난다'라고 헤겔은 어디선가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라고 마르크스는 어디선가 말했다. 바로 그 마르크스의 후계자 호소인들이 일으킨 교조화의 광풍이 비극에 가까웠다면, 최근의 추세는 희극에 가까워보인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불리지만 실은 정치적 단정이라고 번역하는게 적확한 것으로 생각되는 pc주의이다.


 이 희극적 흐름의 가장 큰 문제는 '의도의 구현'이 아닌 '의도'만을 평가받고자 하는 것이다. 이같은 태도는 어떤 분야에서든 문제가 있겠지만, 특히나 예술창작계에 끼치는 폐해는 깊고 넓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의도의 구현'이 기기괴괴하게 부풀어오른 '의도'를 츄파츕스마냥 떠받고 있는 모습은 예술을 설교의 수단으로 오용했을 때 생기는 모든 증상의 압축본과도 같다.


 어쩌면 금방 사그라들 추세에 대한 지나친 걱정인지도 모르지만, 속편한 결론을 내려버리기에 이와 같은 폐해가 예술을 병들게 했던 사례는 충분히 많다. 공교롭게도 마르크스의 병든 사생아들이 이끌었던 사회가 사례집의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더욱 섬뜩한 것은, 생각해보면 그들이 바보였을리 없다는 것이다. 그 교사범들은 정말로 예술을 죽이고 싶었고, 정범에게는 '이것이 바로 예술을 살리는 길'이라고 속였을 뿐이다. 최근 정범의 대표적 범죄 시도로는 이른바 '영혼 보내기' 같은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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