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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Oct 14. 2020

노르웨이 숲의 미도리

나오코가 붉은 피 같은 존재라면 미도리는 이름처럼 대책 없는 녹음의 싱그러운 존재다. 키즈키의 죽음 후 파도가 몰아치듯 스무 살이 되어 버린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목적지도, 결말도 없이 걷는다. 영혼 없이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이렇다 할 마음을 내보이지도 못했는데 나오코는 요양소에 들어가 버리고 이것이 방황인지 먼지의 흐름인지도 모른 채 허무를 삼킨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와타나베 앞에 청량감 같은 미도리가 나타난다.


감독인 트란 안 홍의 마지막 영화를 제외하고는 다 본 것 같다. 트란 안 홍의 영화를 감돌고 있는 색채를 좋아한다. 그의 영화 기저에 깔린 깊고도 밝은 우울감이 좋다. ‘씨클로’에서도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도 절망을 넘어서는 우울함에 정신은 녹아버리고 몸은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했다. 그 사이에 흐르는 필름 카메라에서나 볼 법한 색감이 우울함에 번지는 물감처럼 흐릿하다.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닿을 수 없는 붉은 우울을 정화시키는 것은 맑고 투명한 미도리다. 하지만 우울이란 밝음 속에 숨어 있는 우울이 더 단단하고 크고 위험하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미도리는 와타나베만 곁에 있어주면 된다. 약속을 해 놓고도 만나러 나오지 않아도 남는 게 시간이라 괜찮아, 자산 같은 시간에 책이나 읽은 돼(이런 대사는 실은 없지만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스타일을 떠올렸을 때),라고 해버리는 와타나베를 미도리는 좋아한다. 미도리는 그게 사랑이다. 


하루키의 문체를 영화의 문채로 옮기는 작업은 어렵기 때문에 많은 영화감독이 포기를 했다. 아마 39년은 더 인기가 있을 ‘노르웨이 숲‘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을 때 트란 안 홍 역시 고민이었을 것이다.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서 하루키의 문체를 영상으로 뿜어내야 하기에 한 공간에서 세트를 전부 바꿔가며 촬영을 했고 음악은 류이치 사카모토, 미야자와 리에가 쓰러질 듯 말 듯 멋지게 에이코와 하사코를 다 표현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하루키의 영화는 이창동의 ‘버닝’이다. 그건 정말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루키도 인터뷰에서 이창동 감독을 언급했다.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코와 레이코가 요양하는 시설에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시설에 들어가서 요양을 하는 사람들의 수에 비해 엄청난 시설과 스태프가 훨씬 많기에 돈이 많이 들겠지. 그렇지만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왜곡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왜곡된 마음을 바로잡으려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왜곡을 받아들이려 생활한다. 내게 정말 필요한 시설인 것이다. 그리고 페페를 기르는 카페의 아가씨와 환자 같은 이상한 닥터와 이야기도 나누고 싶고, 나오코가 와타나베의 은밀한 곳을 만져 주었던 강렬한 나무의 냄새가 있던 숲에도 들어가 보고 싶다. 거기서 비틀스의 '노르웨이 숲'을 제대로 듣고 싶다. 왜곡된 마음이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노르웨이 숲’ 속 미도리는 현실감은 제로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다. 그래서 더더욱 사랑스럽다. 붉은 피로 온통 세상이 덮이려 할 때 미도리 하나 만의 존재로도 와타나베는 살아갈만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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