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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Oct 13. 2020

크림 7 [마지막]

하루키 소설




7.


 게으르거나 나태해지는 것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진지하게 노인이 말한 걸 생각해봐도 그 당시에는 원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게 불가능했다. 나의 편협한 사고방식으로 아무리 생각한들 원은 중심이 하나이고 그 중심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이 모여들어 둥근 원둘레를 가진 형태뿐이었다. 컴퍼스로 간단하게 그릴 수 있는 단순한 모양이었다. 노인이 말하는 원은 내가 생각하는 원과 정반대의 원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노인이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노인이 나를 가지고 놀리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노인은 나에게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다시 그 원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생각은 아무런 진전 없이 돌고 돌았다. 어떻게 원의 중심이 여러 개면서 원 일 수 있을까? 고급스럽게 확장된 철학적 비유일까? 나는 그만 포기하고 눈을 떴다. 단서 같은 것들이 좀 더 필요했다.


 눈을 떴을 때 노인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처음부터 그 노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공원에 어떤 사람의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내가 상상해낸 인물인 것일까? 노인은 나의 환상이 아니었다. 노인이 내 앞에 있었고 수호신 같은 우산 손잡이처럼 생긴 지팡이를 단단하게 쥐고 조용히 말하면서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 사라졌다.


 원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느라 나는 차분하고 정상적인 일정한 호흡으로 다시 돌아온 것을 알아차렸다. 여기저기에 있던 급격한 물살은 사라졌다. 항구 위 두꺼운 층의 구름 사이가 벌어져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의 빛줄기가 신의 계시처럼 나와서 정확하게 한 곳을 겨냥하듯 크레인 꼭대기에 있는 알루미늄 형체를 비추었다. 나는 그 신비로운 광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원을 생각하는 동안 과호흡에서 되돌아온 것이다.


 이 모든 이상한 일들이 나에게서 일어난 것을 확인시켜주듯 셀로판지에 포장된 빨간 꽃다발이 옆에 있었다. 이 꽃다발을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하다가 벤치 위에 그대로 올려두기로 했다. 그게 꽃다발의 입장에서도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서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멈춰있던 구름이 흩어지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늘 그렇다는 것처럼.


 내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 약간의 시간의 공백을 가졌다가 후배가 말했다. “이해가 안 돼요.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긴 있었어요? 뭐 어떠한 의도나 써먹을 수 있는 계기나 발단이 있었어요?”


 그 당시 늦가을 일요일 오후에 고베의 산꼭대기에서 내가 경험한 기묘한 경험이 어떤 의미였을까. 그리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라고 후배는 묻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가 하는 질문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후배에게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는 결론이 없었으니까.


 “나도 지금까지 여전히 이해가 안 돼.” 그건 사실이었다. 후배의 말처럼 나 역시 이해되지 않았다. 고대 수수께끼처럼 영원히 풀리지 않는 경험이었다. 그날 일어난 일은 이해할 수 없고 불가사의했다. 정말 나에게 일어난 일이 사실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18살이었던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멈추었던 스트레스성 과호흡 증상이 도래했었다. 나는 그 일로 잠시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할 뻔했다.


 “그렇지만 무슨 느낌인지는 알겠어.” 나는 말했다.


 “노인이 말한 중심이 없는 원의 원리나 의도가 핵심이 아니었어.”

 나의 말에 후배는 전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때의 그 일이 전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후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가 형이었다면 말이죠.” 후배는 말했다. “결말이 없는 게 거슬려서 진실을 알고 싶었을 겁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 저였다면 그랬을 거예요.”


 “물론 그렇겠지. 나도 그때는 몹시 신경이 쓰였지. 또 굉장히 상처를 받기도 했어. 근데 시간이 지난 후 조금 멀리 떨어져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니까 별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화낼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인생의 크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느꼈지. 그건 그것대로 받아들였어."


 “인생의 크림.” 후배가 따라 말했다.


 “이런 일들이 가끔씩 일어나잖아.” 나는 후배에게 말했다.


 “이해할 수 없고 비논리적인 일들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 거슬리는 그런 일들이 생활 속에 파고 들어와 있잖아. 어쩌면 그런 것들에 대해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지. 이해하려고 파고들지 않아도 돼. 그런 기묘한 일들은 그냥 대체로 눈을 감고 있으면 그대로 휙 넘어가는 일들이야. 거대한 파도가 치지만 물속에서는 평온한 것처럼 말이야.”

 후배는 아마도 나의 말에 큰 파도가 피는 평온한 바닷속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숙련된 서퍼였기 때문이다. 파도 그 속에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심각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후배가 말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 안 하는 게 또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맞아 정말 힘들지.”

 이 세상에는 가치 있는 것치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없다고 노인이 말했다. 피타고라스가 자신의 이론을 확고하게 설명하듯 반박할 수 없는 신념에 차서 말을 했었다.


 “중심점은 많은데 원둘레가 없는 원.”


 후배가 물었다. “결국 답은 찾았어요?”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해.” 나는 말했다.


 과연 나는 찾았을까?


 나의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가끔 일어날 때마다 나는 노인이 말했던 원둘레는 없고 중심점이 여러 개인 원을 떠올린다. 그때, 그 당시로 돌아가는 것이다. 정자 벤치에 앉아서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고 미친 듯이 뛰던 심장박동 소리를 들었던 끔찍했던 18살 때로.


 그러다 보면 가끔씩 그 원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심도 있는 이해는 나의 주위에서 맴돌다 사라지곤 했다. 그 원은 아마도 단단하고 실제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표층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심층적인 원일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상대방을 깊이 공감하거나 이 세상이 어때야 한다는 이상향을 가지고 있거나 신념을 발견하면 그때 그 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 원은 내가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머리로 이해해보려고 노력한 기묘한 개념일지도 모른다. 원둘레가 없는 원은 그런 것이니까.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원이었으니까.


현명함은 어려운 것들에 봉착했을 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크림이 된다. 그 외에는 다 지겹고 의미가 불투명한 것들 뿐이다. 그게 백발의 노인이 그 당시 늦가을의 흐린 일요일 오후 고베의 산 정상에서 꽃다발을 손에 쥐고 심장박동에 안절부절못하는 나에게 말해준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도 신경 쓰이는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그 특별한 원과 지겹고 가치 없는 것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한다. 그러면 그 독특하고 유일한 크림이 내 속의 깊은 곳까지 들어와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끝]


직역 : 김가은

인스타그램  @kankim.des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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