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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Oct 12. 2020

하루키 신작 단편 '크림' 6

하루키 소설


6.


 내가 벤치에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노인은 조용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노인의 시선은 단 한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뾰족한 시선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불안했다. 남의 정돈된 뒤뜰에 허락도 받지 않고 마구 돌아다니다 들킨 것 같았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정자를 빠져나가 버스정류장에 최대한 빨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발을 뗄 수 없었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 말고 벤치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힘이 좋은 어떤 무엇인가가 나를 꼭 거기에 붙들어 놓은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때 갑자기 노인이 말을 했다.


 “중심이 여러 개인 원.”


 나는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노인의 이마는 무척이나 넓었고 코는 새 부리처럼 끝이 뾰족했다. 나는 노인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노인이 조용하게 그 말을 반복했다.


 “중심이 여러 개인 원.”


 당연하지만 노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노인이 기독교 확성기 자동차를 운전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근처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럴리는 없다. 목소리가 아까 들었던 소리와 달랐다. 확성기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훨씬 더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미 녹음해 놓은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트럭을 몰며 동네마다 돌아다니는 생선장수처럼 말이다.


 “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지못해 물었다. 나이가 많은 노인이기에 나는 예의를 갖추어서 정중함이 묻어 나오게 물었다.


 “중심이 너무 많아. 아니 어쩔 땐 무한대의 숫자야. 이 원은 원둘레가 없는 원이야.”


 노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이마의 주름을 깊게 만들어 말했다. 나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황당한 상황이 주는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노인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서 몇 가지를 생각했다. 원인데 중심이 여러 개이고 원둘레가 없다. 생각을 하고 생각을 했지만 그런 원이 형상화가 될 리가 없었다. 도무지 상상이 안 되었다.


 “이해가 안 돼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더 나은 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노인은 조용히 나를 쳐다보았다.


 “수학 시간에 수학선생님들은 그런 원에 대해서 한 번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 같아요.” 조용하게 덧붙여 말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럴 테야. 그 원에 대해서 너도 잘 알다시피 학교에서는 그런 걸 가르쳐주지 않을 테니까.”


 내가 잘 안다고? 노인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그런 원이 진짜 존재하긴 해요?” 나는 물었다.


 “당연히 존재하지.” 노인이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원은 진짜로 존재해. 그런데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건 아니야. 알겠어?”


 “볼 수 있다구요?”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한 질문이 어색하게 공기 중에 잠시 동안 매달려 있다가 곧 희미해지더니 결국 사라졌다.


 노인이 다시 말했다. “들어봐, 너 스스로 상상해봐야 해. 네가 가진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그림을 그려 보는 거야. 원둘레가 없고 여러 중심점을 가진 원을 말이야. 만약 네가 피땀을 흘리는 것처럼 엄청난 노력을 들인다면 그 원이 어떤 건지 선명해질 거야.”


 “어렵게 들립니다.” 나는 대답했다.


 “당연히 어렵겠지.” 노인은 말했다.


 마치 딱딱한 무엇인가를 뱉어내는 듯한 소리로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치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없어.”


 그리고 새로운 문단을 시작하듯 노인은 짧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말이지 네가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그 어려운 걸 얻어낸다면 그건 네 인생의 크림이 된다는 것이지.”


 “크림이요?”


 “프랑스 말에 이런 표현이 있어. crème de la crème. 무슨 말인지 아나?”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크림 중의 크림. 그 말은 최고 중의 최고란 뜻이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그게 crème de la crème 야. 알겠어? 나머지는 다 지겹고 쓸모없는 거야.”


 나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노인이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생각해봐” 노인이 말했다.


 “눈을 감고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봐. 중심점이 여러 개인, 원둘레가 없는 원. 우리의 머리는 어려운 걸 생각하고 고민하려고 만들어진 거야. 네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게 끔 돕기 위해 머리가 있는 거라고. 귀찮아하거나 내버려 둬선 안 돼.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야. 지난 과거나 닥쳐올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 말이지. 왜냐하면 지금이 너의 머리와 마음이 동등하게 형체를 이루고 단단해지는 순간이거든.”


 나는 다시 눈을 감고 그 원을 그려보려고 했다. 지금 당장 상상을 하고 노력을 기울였다.


[계속]


직역 : 김가은

인스타그램  @kankim.des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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