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를 받는다
역시 하찮은 것들은 나에게 위로를 준다. 계란 프라이가 뇌의 7구간 영역을 충족시키는 위로라면 늘 지나치며 스치는 풍경은 마음의 이쪽, 부드러운 부분을 위로해준다.
고양이들이 벌써 이만큼이나 컸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꼬물꼬물 새끼 고양이, 아니 아기 고양이들이었는데 여름을 나는 동안 진취적인 풍모를 지닌 모습이 되었다. 이곳은 강변의 풀밭으로 고양이들이 인간이 생활하는 곳에서 떨어져 있어서 먹이를 구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름에는 어찌어찌 하루를 버틸지 모르나 겨울이면 이곳은 혹독해진다. 인간이 생활하는 주택지에는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가 수월하겠지만 온통 풀밭뿐인 이곳에서는 그저 몸을 웅크리고 눈을 크게 뜨고 버틸 수밖에 없다. 낚시꾼들이 고기를 많이 잡는 날이면 기분 좋게 고기를 덥석 던져주지만 그런 행운이 매일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곳의 고양이들은 주택가나 아파트 근처의 길고양이처럼 뚱뚱하지 않다. 조깅을 하다가 비가 갑자기 내리면 몸을 만 채 엎드려 눈에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비가 그치기를, 고기를 던져주기를 가만히 기다릴 뿐인 모습을 왕왕 목격한다. 그런 고양이들이 죽지 않고 이만큼이나 컸다. 토닥토닥해주고 싶다. 잘 버텼다고. 사람들은 십시일반 고양이들의 먹이를 집에서 조금씩 들고 이 먼 거리까지 와서 고양이들의 길목에 놓아준다. 고양이들은 그들 덕분에 위로가 되고 잘 커가는 모습을 보는 고양이들의 모습에 또 이곳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위로를 받는다.
가끔 고양이들의 시체를 볼 수 있다. 강변의 조깅코스는 사람이 도보를 하는 도로와 자전거 도로를 분리해놨지만 자전거들이 도보 도로에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사람들이 걷거나 조깅을 하고 있는데 쌩하며 자전거가 지나가면 위험하다. 그런 자전거에 치여 고양이들은 죽음을 당한다. 사람도 부딪치면 어디가 하나 부러지거나 이빨이 왕창 빠질 것 같은데 연약한 고양이들은 그냥 죽을 수밖에 없다. 그저 쓰러져 숨이 다 할 때까지 할딱 거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길고양이들의 처절한 삶이다. 저 위의 두 녀석은 꼭 늙어서 죽기를 바랍니다.
강변을 달리다 보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고요한 강을 만나는 날이 있다. 대체로 겨울을 이겨낸 4월이나 여름을 보낸 10월에 하늘과 강의 모습이 마치 해야 할 일을 잊고 잠만 자는 제우스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런 날은 자연적인 컬러의 색감이 빠져서 초점 기능이 고장 난 폰으로 담아도 필름의 색감처럼 나온다. 이런 색감은 개인적으로 묘하게 빠져든다. 눈앞에 펼쳐진 자연적인 색감이 이렇게 물 빠진듯한 부드럽고 고고한 색이면 나는 그만 소설 속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마구 뛰어온 덕분에 등에는 땀이 흐르지만 그대로 가만 서서 이 모습을 한참 바라본다.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지만 나에게는 그대로 위로가 된다. 이런 풍경, 이런 색감. 마치 이와이 슌지의 90년대 영화 속으로 들어와 버린 기분.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보면 서서히 노을이 지려고 한다. 10월의 하늘은 일찍이 붉게 물든다. 온몸에 따뜻한 물을 붓고 비누칠을 꼼꼼하게 한다. 거품을 내어서 발가락 사이도, 배꼽 안에도 진지하고 꼼꼼하게 비누칠을 한 다음 뜨거운 물로 씻어낸 다음 두꺼운 이불을 턱까지 올려 다리를 이불에 비비며 잠들어도 좋을 계절이라고 알려준다, 저 붉어지려 하는 하늘은. 이제 곧 찰나의 순간 하늘은 금방 지금의 모습을 바꾸고 달이 하루를 점령해서 해가 했던 일을 대신할 것이다. 이곳에 앉아서 낚시를 즐기는 꾼들에게서는 고기가 잡히지 않아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적극적이되 심각하지는 않다. 제대로 시간을 즐긴다는 기분이 든다. 낚시를 한다는 건 오롯이 낚시에 신경을 써야 한다. 영화나 광고에서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서 책을 읽는데 현실에서는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물고기가 잡히면 손으로 물고기를 잡고 바늘에서 물고기를 떼내서 망투에 집어넣고 갯지렁이 같은 미끼를 꼽는다. 대충 수건으로 닦은 다음 다시 책을 들어서 읽는다? 뭔가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낚시는 오직 낚시 하나에 집중을 하게 만든다. 시선은 찌를 보고 시간과 싸워가며 물고기의 입질을 기다릴 뿐이다. 격동적이지 않고 아주 정적이라 꼭 그림 같다.
드디어 조금씩 저쪽 하늘은 붉게 타오르려고 한다. 이런 순간을 자주 볼 수 있는 요즘이다. 요즘이 아니면 잘 볼 수 없고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광경이다. 천연덕스럽게 얼굴을 바꿔버리는 하늘을 보면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보여줄 테니까 오늘 하루를 또 잘 버텨보던지,라고 시크하게 말을 하는 것 같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누군가에게 부정당하고 또 인간관계에 실연을 맞이하더라도 이렇게 두 발로 버티고 서서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은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작가 오그 만디노의 말처럼 사람들은 늘 화장한 날씨를 고대하지만 매일 날씨가 좋으면 사막이 된다. 하늘은 그런 말을 색으로 우리에게 알린다.
꽃이 좋은 이유는 유일하게 인간생활 전반에서 자연적으로 좋은 냄새를 풍기는 건 꽃 정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지나치면서 나는 좋은 냄새는 인공적인 냄새다. 샴푸 냄새, 방향제 냄새, 향수 냄새, 음식 냄새도 인공적인 냄새다. 대체로 자연적인 냄새는 썩 좋지 못한 냄새뿐이다. 좋지 못한 냄새는 인간이 제일 많이 풍긴다. 똥냄새, 입냄새, 이틀만 머리를 감지 못하면 나는 냄새, 노숙자 옆에 가면 상상을 초월하는 냄새가 나기도 한다. 통칭 사람 냄새가 사람에게는 난다. 인간은 자기 몸에서 나는 안 좋은 냄새를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있다. 향수가 발전한 프랑스를 보면 원래 정말 더러웠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베르사유 궁전이 나온다. 베르사유 궁전은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궁전으로 아름답지만 야외에 화장실이 없었다. 그래서 귀족과 왕족이 야외에서 꽃향기(꽃을 왕이 바뀌면서까지 엄청나게 심었다)를 맡으며 거닐다가 방뇨의 기운이 올라오면 궁전으로 들어가서 방뇨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귀족들은 산책을 하면서, 걸어가면서 소변을 봤다. 당시 귀족 여자의 옷은 한 번 입는데 40분 정도 걸리고 벗으려 해도 그만큼의 시간이 든다. 해서 그냥 볼일을 걸어가면서 보는 것이다. 소변이 다리를 타고 흘러 내려가면 신발에 흙을 묻히게 된다. 그래서 발달한 것이 하이힐이다. 소변은 암모니아로 냄새가 심하다. 그래서 프랑스 하면 향수가 유명하다. 또 지하도가 현존 세계 최고다. 어째서 그렇냐고 하면 영화 '향수'라든가, '레미제라블'을 떠올리면 일반인들이 생활하는 마을의 바닥은 늘 축축하다. 길거리 걸어가다 대소변이 마려우면 그냥 아무 때나 일을 본다. 하수구 시설을 해야 했다. 그래서 강간이 범람했고 여자들은 13세에 아이를 낳았고 20세에 이미 40세의 나이처럼 보이고 오래 살지 못했다. 세균과 함께 성병이 엄청났다. 패션의 나라인 프랑스지만 일반인들은 패션과는 정말 거리가 멀다. 게다가 아직도 지하철이나 지하도는 우리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더럽다.
아무튼 그런 인간생활 전반에서 자연적으로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꽃 정도다. 그래서 봄이면 억지로 프리지어를 구입한다. 거실에, 방에 두면 프리지어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게 정말 말도 못 하게 좋다. 다행히도 강변에는 시에서 적극적으로 때가 되면 계절에 맞는 꽃들을 엄청 심는다. 미관상의 이유도 그렇지만 꽃이 풍기는 좋은 냄새는 늘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저 하찮은 것들이 곳곳에서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고 말없이 말하고 있다. 고요 위에 고요를 덮고 또 그 위에 고요를 덮어서 인간처럼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없이 도로를 지키는 나무를 보면 '나무에 대하여'가 떠오른다.
이성복 시인의 나무에 대하여를 읽고 또 읽어본다.
피와 색이 비슷한 와인의 힘을 빌려 조금은 큰 소리를 내면서
홀딱 벗고 있는 나무를 생각하면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때가 있을 텐데
내가 나무라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와 내가 다른 점은
나는 부끄러운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나무는 그냥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왼종일 서 있는 나무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제 뿌리가 엉켜 있는
땅 밑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라 시인은 말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정현종 시인은 나무는 공기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다 한다.
시인의 삶이란 공기와 땅 밑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서 이토록 안아 주고 싶다.
나무가 된다면, 시인의 말처럼 언젠가 언젠가
저 멀리, 어떤 사정 때문에 저 멀리 두고 온
하늘 아래 다시 서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