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이야기
아이폰4를 들고 다니며 주위 사람들에게 앞으로 아이폰은 4의 디자인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 누누이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도,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도대체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라고 했지만 개인적으로 아이폰4의 디자인이 가장 아이폰다운, 아이폰 같은, 아이폰적인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아이폰4(정확히 4s)를 들고 다니고 있다. 재작년까지 전화기로도 사용을 하다가 유심을 빼버렸다. 그럼에도 메모나 사진은 줄곧 아이폰4로 하고 있다. 다른 어플의 반응이 느리지만 메모를 하거나 사진을 찍는 것에는 아직 빠릿빠릿하여 아무런 답답함이 없다. 늘 이 폰으로 메모를 하는 습관이 들어서 인지 어쩐지 손에서 멀어지면 찝찝한 기분도 든다. 또 스티브 잡스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해서 그런지 늘 들고 다니게 되었다.
스티브 잡스 이야기가 나왔으니 해보자면 우리는 스티브 잡스를 애플의 창시자, 아이폰의 아버지로 알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영화 마이클 패서 밴더의 ‘스티브 잡스'를 보면 그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어떻게 집착과 광기를 보이는지, 그 광기가 지금의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았는지 알게 된다. 영화적으로는 잡스라는 캐릭터는 몽글몽글 없어지고 마이클 패스밴더라는 배우만 남게 되었다고 떠들었지만 잡스의 내면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한때 애플과 삼성의 전쟁이 신문사의 1면 뉴스를 장식했던 적이 있었다. 서로 경쟁이 치열하다 못해 정말 둘 중에 누구 하나 죽어 없어질 정도로 치고받고 난투전이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28살, 아주 팔팔한 젊은 시절에 삼성의 호암 이병철 회장을 찾은 일화는 유명하다.
그때가 83년 11월로 태평로 삼성본관 호암 집무실에 당당히 자신이 만든 리사를 들고 호암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호암은 일흔을 앞두고 있었다. 잡스는 호암을 만나 자신이 만든 매킨토시 1호였던 리사에 대해서 사업 논의를 하려고 했다. 호암은 아마도 자신 앞에 앉아있는 당당한 젊은이에게서 자신의 젊은 모습을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호암은 삼성의 명운을 한 곳으로 모으는 시기였다. 자신의 몸은 이미 암세포가 퍼져있었고 삼성전자 공정을 뒤로하고 삼성반도체 사업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일본의 중공업 미쯔비시 회장(이 호암을 존경한 것으로 알고 있다)도 말렸고, 많은 곳에서 호암의 결정을 말리려고 했다. 미쯔비시 역시 이미 반도체 사업에 한 번 뛰어들었다가 실패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한 번의 실패는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온다는 것을 알았기에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위험하다고 말리고 있었다. 게다가 호암은 자신의 후계자로 맹희와 건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호암은 잡스를 미국으로 돌려보내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온 잡스는 우리가 잘 아는 내용대로 85년 애플사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리고 86년에 애니메이션 회사 ‘픽사’를 차리게 된다. 그때 잡스가 한 사람을 데리고 오게 된다. 그 사람은 70년대 스타워즈를 제작하고 있던 조지 루카스의 루카스 필름의 그래픽 부서에서 그래픽을 만들고 있던 존 라세티였다. 이로써 픽사의 모습을 갖추게 되고 출범한다. ‘픽사’라는 영화사의 이름은 픽셀과 아트의 합성어로 매킨토시 스펠링 역시 미국에서 잼이나 만들어 먹는 맛없는 사과의 Mclntosh가 아닌 애플사의 Macintosh로 잡스가 만들었다.
존 라세티와 손을 잡게 된 건 당시 그래픽으로 중무장해야 할 스타워즈 때문에 파견근무 형식으로 디즈니사에 왔다 갔다 하면서 애니메이션에 눈을 뜬 것이다. 86년 필사 설립 후 잡스는 3D 애니메이션에 매달린다. 하지만 미국의 영화산업은 냉랭했다. 그 누구도 당신의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을 것이다, 어떤 나라에도 팔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잡스가 만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토이스토리'였다. 하지만 만만치 않았다. 이전에는 없던 시도였기에 늘 벽에 부딪치기만 했다.
잡스는 86년부터 95년까지 10년에 걸쳐 ‘토이스토리’ 하나에 집중을 하고 만들게 된다. 10년 동안 애니메이터들이 나가떨어질법했지만 묘하게도 지치지 않고 토이스토리, 우디와 버즈에 매달릴 수 있었던 스티브 잡스에게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 노력이 허황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이다. 비록 생명이 없는 장난감이 주인공이지만 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들 뿐이다. 기계라도 인간의 감성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바이다”라며 잡스는 말했다.
잡스의 이 신념 하나에 애니메이터들이 10년 동안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하나에 밤낮 가리지 않고 매달렸다. 잡스는 그러한 사원들을 위해 10년 동안 생산이 없음에도 직원들에게 투자를 했다. 그 노력 끝에 단편 3D 애니메이션 ‘룩소 주니어’를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평단에서 호평이 이어졌다. 이후 룩소 주니어는 픽사 영화의 첫 시작을 알리는 마스코트가 된다. 후에 디즈니사에 편입이 되었지만 픽사 영화는 반드시 시작에 룩소 주니어가 나오게 된다. 바로 잡스가 디즈니사 와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95년에 ‘토이스토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미국의 평론가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와 비교해가며 곧 망할 것이라 예측했지만 사람들은 우디와 버즈에 열광했다. 3D 애니메이션에 감동을 느끼고 만다. 토이스토리를 보기 위해 미국의 엄마 아빠들이 아이의 손을 잡고 극장으로 몰려드는 기현상을 일으켰다.
이후 픽사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디즈니사로 편입되었고 디즈니가 아닌 픽사의 타이틀로 영화는 계속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토이스토리 2, 3이 나오게 되었다. 그 사이에 잡스는 떠나고 만다. 토이 스토리 3에서 탈출하는 그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3편에서 우디가 대학생이 된 앤디와 헤어지면서 “so long partner”라는 대사를 한다. 이는 곧 픽사가 하늘로 가 버린 잡스에게 하는 말이다. 미국의 영화사에는 애니메이션을 토이스토리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 그것을 이뤄낸 사람이 스티브 잡스였다. 잡스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아이폰에 촛불을 켰지만 영화계에서는 또 다른 영화의 별이 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이폰 12의 모양새가 그렇게 나오리라,라고 이미 잡스가 디자인까지 해 놓은 것이 아닐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