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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Oct 11. 2020

가을 산책

일상 에세이


해는 뜨거운데 바람은 찬, 그런 가을 초입의 바닷가에서 이른 오전에 커피를 마셨다. 반팔에 패딩 조끼를 입고 앉아 있으니 등에서는 땀이 나고 팔은 춥다. 얼굴을 들어 볕을 받을 때 기분이 좋다. 그러나 선글라스에 마스크에 볕이 얼굴의 소심한 면적에 닿을 뿐이다. 이번 여름에도 사람이 다른 여름에 비해 적어서 쓸쓸한 느낌이었는데 바람이 차가워진 바닷가는 하늘과 바다만 파란색으로 멍들어 찬란하면서 쓸쓸하다. 그래도 바다는 인간의 감정과 무관하게 그대로이다.


늘, 매년 있는 일이지만 다시 또 시월이 왔다는 게 안정적이면서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신기한 일은 언제나 옆에서 살짝 어깨를 툭 치듯 지나간다. 그걸 알아채기가 참 힘들지만 아는 순간 권태와 무료함에서 벗어난다. 그런 순간은 늘 도사리고 있고 팔에 힘을 주어 열심히 뻗어야만 느낄 수 있다.

하루가 지나간다. 평온하고 고즈넉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하루가 또 지나간다. 뉴스만 틀면 누군가가 죽고 떨어지고 코로나에 걸리고 시기 질투에 싸우고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지만 이쪽으로 약간만 고개를 돌리면 세상은 언제 그런 일들이 일어났냐는 듯 고양이 발바닥처럼 보송하고 평안하다.


그러니까 하루키의 잡문집을 보면, 1929년 10월 주가 대폭락, F. 스콧 피츠제럴드는 대서양 너머 저 멀리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뉴스를 접했다. 그 소리는 사막 끝까지 메아리쳤다,라고 그는 훗날 회고했다. 그런데 피츠 제럴드는 그때 그 사건이 세계 역사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칠지 이해했을까? 어쩌면 그는 월가의 소동보다는 아내 절다의 정신병과 소설가로서의 슬럼프 같은 개인적인 문제로 훨씬 더 속을 배웠는지 모른다.


"들었어?"

"별일 아니야."

"우리나라로 돌아가서 확인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됐어-별일 아니야."

-스콧 피츠제럴드 [마이 로스트 시티]


우리도 지금 무지막지한 변이의 시기에 실은 살이 찐 탓에 겨울 옷이 안 맞아서 고민하는 것에 더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니까. 인간이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런 생활에 신경을 쓰며 살아가야 삶이 찌르는 막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침마다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는 하늘은 파란 페인트를 한 통 다 써버린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있다. 그런 하늘 밑이라면 앉아서 컵라면에 김밥을 먹어도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자주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는 이유는 이 하늘의 청량하고 맑음이 나의 더럽고 찌꺼기가 낀 마음을 조금이라도 닦아 줬으면 해서다. 마음은 개울물과 비슷하다. 맑은 개울물이 한 번 더러워졌다가 깨끗해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한 번 더러워진 마음도 깨끗해지는데 오래 걸린다. 어쩌면 마음이란 다시는 깨끗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러운 마음 그 위에 깨끗한 또 다른 마음이 덮어주기에 인간은 때로는 평소와 다른 면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강풍주의보가 떴다. 다른 지역은 모르겠지만 자려고 누웠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창에 부딪힌다. 마치 렛 미 인?라고 하는 것 같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지만 손등과 손바닥으로 느낄 수는 있다. 바람은 어딘가에서 불어와 내가 있는 이곳까지 와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꼭 나를 느껴달라고 하는 것 같다. 가을은 그런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아직은 반팔을 입어도 무리 없지만 또 어느새 캐럴을 틀어도 이상하지 않는 날이 곧 닥친다. 선풍기를 틀며 캐럴송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니 인간은 아이러니다.

모든 동작을 멈추고 일어나서 기지개를 한 번 핀 다음 밖으로 나가 인간의 삶과 밀접한 곳의 자연 속으로 들어가 본다. 아름답다. 왜냐하면 인간이 잘 가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손을 탄 자연은 인간의 시선을 사로잡고 그 속에 인간을 머무르게 한다.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자연은 절대 그런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무섭고 공포고 호러블 하고 가만히 있을 뿐인 나무와 풀이지만 한 시간만 지나면 대자연이 뿜어내는 맑은 공기에 질식해서 쓰러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공포를 전혀 느낄 수 없다. 호수도, 다리도, 연꽃도 그리고 그 속을 다니는 모든 사람들도 아주 평화로워 보인다. 맨 위에서 말한 것처럼 평온하고 고즈넉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무심하게 하루는 그렇게 우리의 곁을 스치듯 지나간다. 또 한 번의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들고 다니는 폰을 꺼내 사진을 담았지만 초점 기능이 박살 나는 바람에 사진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몇 컷 지나가는 가을을 담아본다.
집 뒤의 호수는 집 앞의 바다와는 다른 색이다
나에게 노년이 있다면 이렇게 산책을 즐길 수 있을까
가꾸어진 자연은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맑고 청량하고 고요한 가을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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