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Nov 22. 2020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282

10장 4일째

282.


 회사에서 마동을 찾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회사는 마동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조직은 개개인을 통제할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 개개인은 조직에 속한 이상 조직의 이익을 창출해 내야 한다. 마동은 그런 기본적인 틀을 잘 지키며 지금까지 생활을 해왔다. 마동의 기본 틀이 며칠 만에 깨져 버렸다. 앞으로 회사에서 다시 일 할리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일을 하고 싶다.” 공허한 방 안에서 마동은 소리를 내어 조용히 말을 해 보았다. 소리는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방 안에서 방황하다 안타깝게 사라졌다.


 이제 정원이 딸린 집에서 향이 좋은 소나무를 심어놓고 매일매일 쳐다보는 생활도 할 수 없겠지.     

 

 늙은 소피가 한국에 가끔씩 놀러 와서 소나무를 구경한다. 늙은 소피는 남편과 딸 둘을 데리고 나의 집에 휴가를 온다. 딸은 쌍둥이다. 소피를 닮아 아주 귀엽고 예쁜 아이들이다. 소피는 정원에서 늙은 나와 나의 가족과 함께 와인을 즐긴다. 와인에 어울리는 육즙이 좋은 한우를 구워 먹고 있다. 정원 가득히 고기 굽는 냄새가 풍기고 우리들은 와인을 곁들이며 짧은 시간의 행복이지만 불평 없이 만끽한다.


 -미국의 생활은 어때? 소피


 -동양의 멋진 친구, 우리는 잘 지내지. 매년 초대를 해줘서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


 와인을 연거푸 세잔을 마시고 나니 술기운이 올라온다. 우리들은 이제 늙었다. 오래 전의 젊음은 모두 사라지고 시대는 변했다. 세대는 교체되었다. 각자 어려운 일도 있었다. 몸과 정신의 변이를 거쳐야 했고 성인 영화에 노출을 끊임없이 보이며 타인의 눈초리를 받고 타인을 피해서 다녀야 했다. 대통령은 보호무역의 나라를 비판하면서 우리나라마저 자유무역에서 보호무역으로 돌려버렸다. 공익사업의 상당한 부분도 민영화를 시켰다. 생필품의 물가는 매년 20원씩 올랐으며 성범죄자들의 사형제도가 생겨났다. 의미를 지니는 모든 부분이 하나씩 사라져 가거나 또는 생성되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애벌레가 껍질을 깨고 나오듯 각각의 나라에서 가족을 만들었고 세월이 흘러 모두 늙었다. 소피는 일선에서 물러나 캠페인 회사에서 일을 했고 앞으로도 죽 할 것이다. 그곳에서 만난 미국인 스티브와 결혼을 하여 예쁜 쌍둥이 두 딸을 낳았다.


 소피는 쌍둥이를 낳을 당시 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아기들이 세상에 나오게 하기 위해서 복용하던 약도 중단했고 쌍둥이를 낳겠다는 일념 하에 목숨을 걸었다. 수술대에 붙어있는 계기판의 수치는 위험수위를 넘었다. 소피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이들을 낳았다. 또 하나의 세계를 보았던 것이다. 소피는 아이들을 낳고 스티브를 통해서 나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했고 나는 매년 여름이면 소피의 가족을 집으로 초대해 휴가를 즐긴다. 우리들의 모습에서 젊음이란 모두 사라졌지만 약간의 여유로움과 안정이 오래 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돌아가 봐야 한정된 기능 속에서 그 기능을 이빨이 있는 지렁이가 갉아먹는 소리처럼 소름 돋는 생활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정원의 한편에서는 아이들이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뛰어다니며 즐거워하고 있다. 행복한 시간이다. 소피의 가족에게서, 나의 가족에게서 초조함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중년의 소피와 나보다 7살이 많은 스티브는 한우의 맛을 느끼며 와인 잔을 부딪쳤다. 나는 연거푸 와인을 몇 잔이나 마셨다. 입안이 꺼끌꺼끌하다. 소피는 한우가 든 접시와 와인 잔을 들고 나의 아내 옆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나에게로 다가온다. 나는 와인을 많이 마셨는지 조금 어지럽다. 아내의 얼굴이 가물가물 거린다. 아내의 채취가 빠져나와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는 어이없게도 그런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있다. 소피가 어느새 옆으로 와서 와인 잔에 와인을 부어주었다. 할 말이 있다고 한다. 나는 어지러워 양손의 검지로 관자놀이를 세게 누른다.


 -동양의 멋진 친구,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당신이 바로 나니까.


 당. 신. 이. 바. 로. 나. 니. 까.


 사라 발렌샤 얀시엔이 오래전에 나에게 했던 말이다. 나는 와인 잔을 손으로 들어 올리다가 고개를 든다. 늙은 소피는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얼굴을 하고 숨 막히는 가슴골을 내보인다.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얼굴로 바뀐 소피의 얼굴은 흐릿하게 막이 껴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내를 찾는다. 아내가 내 곁으로 달려왔지만 아내의 얼굴도 지우개로 뭉개 놓은 그림처럼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라 발렌샤 얀시엔은 한 손에는 한우가 담긴 접시를 들고 나에게 와서 접시를 보여주었다. 접시에는 어린 시절 철길에서 분쇄되어 흩어져 버린 아이들의 살점들이 놓여 있었다.


 -당신이 바로 나니까.


 나는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내가 당신이니까요.


 눈을 떴다. 의사가 나가고 마동은 또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꿈을 꾸면 사라 발렌샤 얀시엔이 보였지만 얼굴 형상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잠에서 깨어나도 성몽 뒤에 밀려드는 현실과 비현실의 감각이 무뎌지는 현상 같았다. 마동은 눈두덩을 두 손가락으로 야무지게 비볐다. 눈꺼풀에 화풀이라도 하듯 억척스럽게 손가락을 돌렸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사라 발렌샤 얀시엔이 꿈에 나타나고 나면 현실에서는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얼굴을 떠올리면 거짓말처럼 는개의 얼굴이 그 위에 덧입혀져 나타났기 때문에 초조함은 더 크게 들었다.


 어째서 아무런 상관도 없는 는개가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얼굴에 겹쳐 나타나는 것일까. 는개 때문인지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얼굴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먼 기억 속의 기찻길 위에서 희미한 태양빛을 받으며 옆에 누워서 나의 손을 잡아 주며 웃어 주었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어린 시절 병원 복도에서 내 손을 잡고 그 길을 같이 걷던 따뜻했던 손의 주인공이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계속]



작가의 이전글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28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