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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Nov 23. 2020

사각의 매일 우유를 빨아먹으며

일상 에세이


네모난 각에 빨대를 꽂아서 먹게 되면 우유에서 어릴 때 아버지와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나온 후 마셨던 우유의 맛이 난다. 단맛은 없는데 달달한 맛이 느껴지는, 모두가 초콜릿 우유에 빠져있어도 네모난 각의 우유에 빨대를 꽂아서 쪽쪽 빨아먹고 있으면 초콜릿 우유보다 더 맛있었다. 묘하게도 주둥이를 벌려서 마시는 우유 맛은 전혀 어릴 때 맛이 나지 않는다. 혀끝으로 느껴지는 맛도 분명 다르다.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주둥이를 벌린 우유를 마시기도 하는데 그냥 우유의 맛이다.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딱 흰 우유! 그것이다. 


주둥이를 벌려 마시는 우유는 국민학교 때 억지로 매일 받아서 먹어야 했던 우유의 맛이 있다. 바로 마시지 않고 집으로 들고 오면 배가 부른 아이처럼 부풀어있다. 빨대를 꽂아서 먹던 우유는 목욕 후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느리게 마셨던 맛이 있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먹는 우유의 맛은 급하게 먹던 우유와는 맛이 달랐다. 목욕 후 노곤한 몸으로 천천히 빨아 마시는 우유가 모르핀처럼 퍼질 때면 온 세상이 만개한 벚꽃처럼 느껴지고 술에 취한 것처럼 기분이 좋다가 그대로 이불을 덮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요리사 박찬일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에도 잘 나와 있지만 맛이라는 건 추억의 절반이 아니라 70% 이상은 맛으로 기억되지 싶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매일우유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폴라 압둘의 러시 러시를 듣는다.


러시 러시의 뮤직비디오에는 미소년인 키아누 리브스가 나온다. 폴라 압둘의 미모가 최고일 때 러시 러시를 불렀다. 뮤직비디오에서 폴라 압둘이 키아누 리브스에게 키스할 것 같더니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숙맥인 키아누 리브스를 애타게 한다. 고소영의 점보다 폴라 압둘의 점이 더 섹시하다고 생각했고 폴라 압둘은 노래를 정말 잘 불러서 노래를 듣는 동안에는 몸을 이렇게, 이렇게 흐느적거리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폴라 압둘은 정말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도전자들의 감정에 가장 많이 이입이 되어서 슬퍼하고 기뻐하고 모두에게 긍정적이다.


조깅을 좀 하고 돌아오는 길에 농산물 시장으로 왔다. 밤이라 모두가 문을 닫고 퇴근을 했는데 아직 집으로 가지 못한 늘봄 상회 안에서는 난로를 피워놓고 느긋하게 의자를 붙여서 다리를 쭉 뻗고 반쯤 누워있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보았다. 70살이 다 된 것 같았는데 더 나이가 많은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모른다. 그들은 느긋했다. 오늘은 일요일 밤이니까 이렇게 좀 있다가 들어가자며, 느긋하게 과일을 입으로 넣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다. 부부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당연한 일인데 그게 마치 일탈을 보는 것처럼 되어 버린 요즘이다. 하하, 호호 크지 않는 웃음소리가 늘봄 상회 안에서 기분 좋게 울린다. 아마도 노부부는 어렵고 힘든시기를 한 곳에서 같이 이겨냈으리라. 그렇기에 저렇게도 모든 것을 초월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과일을 나눠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부부에게 초초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평소 주위는 빠르게 흘러간다. 모두가 시간이 없어서 빨리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오늘 됩니까? 바로 됩니까? 내가 평소에 가장 많이 듣는 소리다. 당장 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얼굴을 한다. 대체로 초조하다. 그래서 카페가 곳곳에 있어야 한다. 카페 안에서는 초조함을 느끼지 않는다. 단지 카페를 채우는, 초조함이 없는 사람들은 대다수 젊은 사람들이다. 


생계를 위해 일하고, 누군갈 만나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어딘가에 올리는 글을 적고, 메일을 받고 수정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하루키 소설을 조금씩 읽고,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피규어를 정리하고, 잠들기 전에 영화 한 편을 보고. 이런 일은 하루를 금방 지나가게 한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은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유를 늘 바라지만 막대한 자유가 주어지면 불안해한다. 며칠이 몇 달이 되어버리면 인간은 조급해하고 초조함에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바쁜 일상의 틈을 벌리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사각의 매일우유 각에 빨대를 꽂아서 천천히 빨아먹으며 폴라 압둘의 러시 러시를 들으며 늘봄 상회의 주인 부부처럼 느긋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느리게 보낸다. 느리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다면 아마도 인생은 꽤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https://youtu.be/LNPb931Hq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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