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라디오에서 좋은 말을 들었다. 좋은 말이라는 건 평소에서 약간 벗어나서 지내다 보면 그 세계에서 생각하는 것들이 라디오에서 나올 때 좋은 말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질병은 시간의 낭비다.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몹시 안타까워하며 심지어는 화를 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현재’는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현재란 몇 시간? 며칠을 말하는 것일까.
조금 있다가, 할 때 조금은 얼마 동안을 말할까. 금방이면 돼, 할 때 금방은? 찰나는? 이따 봐, 할 때 이따는?
과연 시간이라는 게 인간의 영역 안으로 끌어 들여와서 숫자로 표기를 해놨지만 그 형이상학적인 세계에 대해서 인간이 지정을 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모순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낭비를 싫어하지만 생활 속에 시간의 낭비는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깊이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 찰나를 찾아보면 75분의 1초, 약 1.6초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찰나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우리가 ‘1.6초’를 넣어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엄마에게 유튜브 조금만 볼게,라고 했을 때 엄마는 또 시간의 낭비가 저절로 머리에 대입이 된다. 곧, 갈게.라고 말하는 남편이 3시간이 넘도록 아직 회식자리에 있으면 아내는 시간의 낭비가 또 스치고 지나간다. 그럼 시간의 낭비를 하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시간의 낭비를 줄이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한해의 끝에서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며 대체로 시간의 낭비가 일상을 파고 들어서 후회를 한다.
그리고 수순처럼 신년에는 해야 할 것들을 나열한다. 꼭 해내야지, 하면서 계획을 짠다. 하지만 내년의 오늘이 되면 어김없이 오늘처럼 똑같이 시간의 낭비로 인해 후회를 한다. 아무것도 한 거 없이 한 살의 나이를 먹었다고 안타까워하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의 낭비를 줄이려면 뭘 하면 좋을까.
신년에 하고 싶은 것을 적기보다 하지 않아도 될 것을 적어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의 아저씨'에도 그런 대사가 나왔지만, 어릴 땐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행복하게 보낼 것만 같다.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되고 보면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매일매일 떠오르는 해처럼 솟아오른다. 한두 번이 아니다. 매일 행복하게 보내기는커녕 불행하지 않게 하루를 견디면 다행이다.
오늘도 기사에는 통장잔고에 130억이 있는 스타강사의 소식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돈이 많다고 해서 하고 싶은 걸 전부 다 하면서 살 수는 없다. 돈이 많다는 건 하고 싶지 않은 걸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점에서 돈이라는 건 필요하다.
[코로나로 인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오랜 기간, 이렇게나 처절한 고통에 처하리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소수의 감염병 전문가들이 그런 어두운 전망을 내놓기는 했었지만 스스로의 체감을 통한 확신적 예측이었다기보다는 과거의 유사 사례로부터 학술적으로 추정하는 경고에 가까웠죠.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살아있는 사람 가운데 그런 사례를 체험한 일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이에 견줄만한 규모의 역사적 경험이라는 것이 가장 최근의 것으로만 따져도 무려 100년도 넘은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란 현실을 냉정하게 직면하기보다는 자신도 모르게 소망의 렌즈를 끼고 현재를 바라보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 많은 전문가들조차 쉽사리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게, 코로나 19에 대응하는 백신의 개발입니다. 지금까지의 백신은 장장 10년가량을 투자해서야 손에 얻을 수 있었고 어떤 소모 물질이 어떤 효과와 부작용을 가지리라고 정확히 예측해내는 것은 과학의 영역 이상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코로나 19의 파괴력은 생각보다 강했지만 그에 대응하는 백신은 예상보다 일찍 현실화됐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코로나 19가 시작됐을 때보다 더 불안해지고 마치 암흑 속에 놓인 것 같은 시점보다도 더 많이 다투고 미워합니다. 그간 많이 지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막상 방법을 얻고 희망을 품게 되니 더 성마른 마음이 드는 것이겠지요.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개혁의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전진할 때도 후퇴할 때도 있지만 크게 보면 조금씩이라도 더 나아지는 것을 얻어온 흐름인데 상황이 이보다 더 안 좋았던 시점보다도 더 크게 절망하고 심지어 원망하고 다그칠 누군가를 우리 안에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잠시 멈춰 생각해봅시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의 초입보다도 더 절망적인 조건에 처해있는 걸까요. 또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크게 추락했던 그 날들 보다도 더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걸까요. 2020년 12월 29일 정준희의 생각, 아니 정준희의 질문이었습니다.]
정준희 교수의 이 짤막한 브리핑을 들으며 지금 처한 상황은, 지금 우리가 놓인 이 절망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서로 원망할 누군가를 절실하게 찾아야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된 데는 펜데믹이라는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태에 놓인 보잘것없는 나약한 한 개인으로써 절망이라는 거대한 무게가 자꾸 눌러서 그럴지도 모른다.
두 달 후보다 내년이 먼저 와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가오는 신년의 계획을 해야 할 것보다,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생각해보는 것이 더 낫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건 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 시점, 이 시국, 이 사태에서 깊은 정적 속에 있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얼마 전에 스위트 홈을 다 봤다. 스위트 홈은 당분간 인터넷 세계에서 많은 풍문을 남길 것이다. 영화는 괴물을 피해 집단을 만들어 지내는 사람들을 중점적으로 비춘다. 사람의 본모습을 말한다. 영화 미스트에서도, 미드 컨테이전이나 워킹 데드에서도 사람에 대해서 다루었다.
서로가 믿어야 함께 지낼 수 있지만 마음은 불신하고 있는 모순의 형태를 지닌다. 나는 감염이 되지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감염이 될 수 있기에 감염자가 완벽하게 괴물이 되기 전까지 벽안에 가둬두는 방식으로 곁에 두려 한다. 왜냐하면 나 역시 감염이 될 수 있기에. 그렇기에 감염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고 교묘하게 감염자들과 같이 지낸다.
이런 모습은 현재 실제의 우리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선별 진료소에서 무료로 검사를 받은 사람들이 음성 판정을 자신의 sns에 올리고 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양성이 나왔어도 올렸을까. 나는 음성을 받았으니 안심이라고 양성 판정자들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버리는 것을 수도 있다. 음성 판정을 받은 사람 중에 매일 사무실에 나가야 하고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사람이라면 이 한 번의 검사가 끝이 아니다. 또 받고 또 받아야 한다. 그럴 때마다 sns에 올릴 수 있나. 그러다가 덥석 양성이라도 나오면 똑같이 올려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감염병 자체보다 감염이 되었을 때, 감염이 되기 전에 나를 대하던 사람들이 변하는 것이, 나를 다르게 대하는 것이 더 무서운 것이다. 양성 판정을 받은 확진자는 다 나았어도 사람들이 피한다. 걸렸다가 나은 당사자도 나 때문에 혹시, 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피한다. 말 그대로 일상이라는 게 파괴되고 깨져버린다. 현재 그토록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소원처럼 되어버린 시대에 이제 그렇게 될 수 없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 음성 판정을 받은 sns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금을 그어 놓고 더욱 소외시켜 버리는 것이다. 옳은 선택이라도 올바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꼭 말해주고 싶다.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오늘부터는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생각하기로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내 팔 안에 있는 것들을 더 끌어안고 그것들에게 더 마음을 주자. 새책도 좋지만 읽던 책을 한 번 더 읽고, 오늘도 한 끼 먹은 것에 좋은 마음을 갖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