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5일째 저녁
406.
“이것 봐, 눈을 떠라구. 그리고 두려움에 한없이 젖어들어라. 두려움이라는 건 느낄 수 있을 때 느끼는 건 좋은 거야. 이제 조금 있으면 너의 그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니까 말이지. 눈을 뜨고 두려움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차피 너의 눈을 도려내야 하니까 말이지. 싫든 좋든 눈을 뜨게 될 거라구. 이봐, 그리고 서서히 너의 뇌 속에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뉴런과 시냅스를 잘라 낼 거야. 그게 내가 할 일이야. 그런거라구. 잘라낸 시냅스는 내가 가지고 가지. 넌 남아 있는 걸로 앞으로 살아가면 돼.” 철탑 인간은 세 개의 칼날을 서로 끼이익 부딪히며 말했다.
시냅스? 뉴런? 여자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을 가진 의시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내 머릿속은 일반인들보다 많은 수의 시신경과 대뇌피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의 대뇌피질이나 시신경, 좌 뇌, 우 뇌 공간감이나 분석적 사고가 변이를 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이런 나의 뇌 변이를 막고 있는 것이 이드를 누르고 있는 또 다른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장군이에게서 들었다. 그렇다면 저기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나란 말인가.
나는 걸음을 천천히 옮겨 철탑과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남자 곁으로 걸어갔다.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사람이 뒷모습으로 돌아앉아 있어서 저 사람이 내 모습인지 인지하기 어려웠다. 나는 나의 뒷모습을 알지 못한다. 특히 무릎 꿇고 앉아있는 뒷모습은 전혀 모른다. 그동안 나는 왜 거울로 비치는 나의 뒷모습을 봐놓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들의 뒷모습은 잘 봤으면서 나는 내 뒷모습에 대한 모습을 확인한 바가 없어서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뒷모습에 막대한 슬픔이 스며들어 있지는 않았는지, 뒷모습이 당당했는지 뒷모습의 옷 입은 모양새가 괜찮았는지, 조깅을 할 때 뒷모습이 우습지는 않았는지 왜 한 번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수만 가지의 생각이 흩어지는 낙엽처럼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져서 뜨거운 소각장 안에서 다 타버리듯 나는 내 뒷모습에 대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잘못 박힌 나사가 세상에 지니는 힘에 의해 문드러져서 더 이상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습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이 그랬다. 내가 내 뒷모습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내 뒷모습이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바뀌거나 하지 않는다. 내 뒷모습은 흘러간 시간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다가가는 발걸음이 덜덜 떨렸다.
옛 시대의 내음이 났다. 녹슨 못에 묻어서 풍기는 피비린내와 같은 냄새가 마동이 철탑 인간이 있는 근처로 다가 갈수록 강하게 번졌다.
“이봐, 그렇게 떨건 없다구. 그렇게 몸을 떨어봐야 힘만 빠질 뿐이야. 눈을 감고 있다고 해서 작업이 순조롭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네. 나는 프로페셔널하지. 순식간에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느긋하게 하기도 해. 고통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천천히 작업을 하기도 한다네. 먼저 이 첫 번째 칼로.”
“단조로울 걸세. 아차 하는 그 순간 각막을 칼날이 도려 낼 거야. 교묘하게 도려 낼 걸세. 난 아주 섬세한 칼잡이라 동공과 홍채는 그대로 둔 채로 자네의 각막만 도려낸다는 말이네. 차갑고 날카롭게 자네의 각막을 도려낼 때 자네는 진정한 고통을 느낄 거야. 하지만 괜찮다네. 각막을 도려내는 건 금방이니까 말이네. 아 이런, 비가 떨어지는군.”
철탑 인간은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남자에게 속삭이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간헐적으로 떨어지던 비가 하늘에서 투두둑하며 일정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는 철탑 인간을 적시고 무릎을 꿇고 있는 그 남자를 적셨다. 철탑 인간은 비가 오는 것엔 신경 쓰지 않고 비를 맞고 쇳가루를 뿜어내며 칼을 그의 눈앞에 대고 음산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비를 맞고 철탑 인간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비린내가 근처에 진동을 했다. 쇳덩어리가 자아내는 말캉한 비릿한 내음, 선택에 의해서 자아내는 내음이 아닌 강요에 의해서 뿜어져 나오는 그 냄새의 포자가 철길 위로 떠올라 공간을 마구 헤집고 다니며 비린내를 확산시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