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Jun 17. 2021

컵라면을 하루에 한두 개씩 먹었던 때

음식 이야기

컵라면은 하루에 한두 개씩 먹었던 때가 있었다. 가난에 굶주려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컵라면이 많아서였다. 컵라면은 기묘하게도 밥을 먹고 나서 먹어도 맛있고, 밥과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 물론 컵라면만 먹어도 맛있으니 다량의 컵라면이 옆에 있으면 그렇게 먹게 된다.


라면이 언제 맛있을까 대한 논의는 사람들 간에 치열하지만 그저 지금 먹는 라면이 가장 맛있다. 컵라면에는 어떤 기운 같은 것이 있는데 오늘 집으로 가면서 머릿속에서 오늘은 봉지라면을 끓여서 이것저것 넣어서 이렇게 차려 놓고 먹으리라, 라며 집으로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몸을 바짝 말린 다음 주방으로 가면 그만 그 기세가 꺾여 그냥 컵라면을 먹게 된다. 그런데 그게 또 맛있다.


컵라면은 봉지라면처럼 부산 떨며 먹지 않게 나온 음식인데 요즘은 기묘하게도 컵라면은 집에서 간단하게 끓여 먹고, 봉지라면은 강변에 딸린 즉석 라면 집에서 부산을 떨며 끓여 먹게 된다. 어쩐지 세상이 점점 뒤바뀌어 가고 재미있어진다. 그러니 라면에 지지 말고 타협을 하면서 적당히 삶을 살아가자.


컵라면을 매일 먹었을 때가 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다. 입원이라고 하지만 흔히 말하는 나이론 환자였다. 그때의 여자 친구와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고 건널목을 건너다 자동차가 죄회전을 하면서 여자 친구를 친 것이다. 횡단보도 위에서 픽 넘어졌다. 자동차는 아주 천천히 움직였지만 그대로 부딪히면 타격이 오고 넘어지게 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자동차 바퀴가 여자 친구의 허벅지를 조금 밟고 지나갔다. 이렇게 말을 하면 보통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바퀴가 다리 위를 지나간 것이 아니라 다리 길이와 같은 방향으로 꼬집듯이 허벅지를 물고 지나갔다. 어떻든 차에 부딪혀 넘어진 여자 친구가 타이어에 의해서 허벅지 아래 부분이 밟혔으니 아파서 지르는 비명에 운전자는 그만 다시 후진을 하면서 또 한 번 허벅지의 살점을 물고 지나갔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서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그때 여자 친구가 넘어지면서 나를 힘껏 잡았는데 나까지 홀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길거리는 순식간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전부 우리를 구경했다. 분명 누군가는 폰으로 우리를 찍는 것 같았는데 경황이 없어서 그런 것까지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다행히 운전자가 우리를 빠르게 차에 실어서 병원으로 옮겼고 보험처리를 해주었고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운전자는 60대로 우리를 보지 못하고 횡단보도라서 일단 천천히 좌회전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아저씨는 교육을 잘 받으며 생활한 사람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비용을 다 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병원에서 완전히 나을 때까지 입원 치료를 하라고 했다. 그런 올바른 태도 덕분에 우리도 아저씨와 인사를 웃으며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나에게도 입원을 해서 검사를 받아 보라고 했다. 나는 손을 저었다. 다친 곳이 없고 나는 차에 부딪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넘어졌으니 지금은 모르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후유증이 올 수 있으니 입원해서 검사를 받아 보라고 했다. 주위에서도 그렇게 말을 하니 떠밀려서 입원을 하게 되었다. 아저씨는 정말 매일매일 찾아와서 안부를 물었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겨우겨우 말려서 더 이상 병원에는 오지 않았다. 점잖은 분이라 인사를 하고 난 후 2분이 지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맹숭맹숭했다.


병원에서 주는 병원 식은 다들 맛없다고 하던데, 그래서 병실 사람들은 집에서 싸온 반찬과 함께 먹던데 내 입에는 병원 식이 아주 맛있었다. 반찬 같은 거 남김없이 홀라당 다 먹었다. 나는 6인실이었고 여자 친구는 2인 실에 있었는데 남은 침실에 아직 입원하는 환자가 없어서 잠을 잘 때 빼고는 2인 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루하고 재미없을 법도 한데 간호사들과 의사들의 사진을 찍어 주고 밤에 병원을 빠져나가 사진 작업을 해서 다음 날 액자에 넣어서 사진을 나눠주었다. 병실의 환자 가족들 사진도 그 자리에서 찍어서 그렇게 사진을 만들어서 나눠주었더니 이상하게 병원에서의 생활이 바빠졌다.


입원했을 때 친구들이 매일 병문안을 왔는데 올 때마다 컵라면을 들고 왔다. 그래서 컵라면이 종류별로 아주 많았다. 다른 건 들고 오지도 않았다. 꽃이라든가, 음료 같은 건 아예 생각도 없고, 컵라면, 컵라면, 컵라면, 컵라면을 들고 왔다. 들고 와서는 지들끼리 끓여서 먹고.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컵라면만 계속 사 오니까 컵라면은 산처럼 쌓이게 되었다. 그래서 병실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간호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이상하지만 어쩐지 매일 컵라면 파티처럼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컵라면과 함께 먹거나, 간호사들이 잘 먹었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때가 2월이었는데 한 번은 눈이 한바탕 왔다. 컵라면은 오밤중에 야외에서 먹으면 더 맛있는 법이다. 병원은 야외 잔디밭이 있고 거기에 벤치도 있어서 친구와 여지친구와 나는 벤치에 앉아서 컵라면을 먹었다. 사실 컵라면은 안주였다. 여자 친구는 다리가 불편해서 휠체어를 탔는데 휠체어에 컵라면과 맥주를 싣고 병원을 빠져나와 야외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컵라면이 7개 있었는데 왜 그만큼 다 물을 부었냐 하면 친하게 지내는 인턴들이 있었다. 개고생 하는, 정말 씻지도 못해서 이게 무슨 몰골이야! 할 정도의 인턴들에게 연락해서 라면 먹으러 와, 하면 달려와서 같이 먹었다.


새까만 밤에 하얀 눈이 떨어지는 잔디밭에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과 환자복을 입은 우리와 또 평상복을 입은 친구가 한데 어우러져 컵라면을 호로록호로록하며 먹었다. 속이 뜨거우면 맥주로 달랬고 맥주로 위장이 차가워지면 컵라면의 짭조름한 국물을 프르르륵 삼켰다. 병원에서 지내게 되면 친하게 되는 의사와 간호사가 생겨난다. 보통은 한 병실에 있는 환자나 환자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나는 나이론 환자라 아침에 왕진을 다녀가면 병실을 나와서 지냈기에 의사나 간호사들과 좀 더 친하게 되었다. 나는 10일 정도 있다가 퇴원을 했다. 아마 더 있으면 살이 너무 찔 것 같았다. 아픈 곳도 없고 물리치료실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도 우습고 무엇보다 병원에 오래 있으면 무기력해지는 것 같다. 퇴원한다고 했을 때 담당 의사와 간호사의 서운한 인사가 생각난다. 그때 컵라면을 아주 맛있게 먹는 방법을 알려주고 왔는데 짜장라면에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어서 먹게 했더니 진짜 맛있게 먹는 것이다. 시럽 통 같은 데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어서 컵라면을 먹을 때, 특히 짜장라면에는 딱이다. 아마 한국인에게 라면에 대한 추억은 정말 끝도 없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 같은 날 달래무침에 밥 비벼 먹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