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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r 23. 2021

비는 소바와 티라미수를 타고 4

단편소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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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알게 된 것은 두 달 전쯤이었다. 세 달 전인가? 네 달? 모르겠다. 기억이란 언제나 제멋대로다. 띠동갑의 여자 친구가 있다면 기억이란 띠동갑 여자 친구, 그런 것이다. 그녀를 언제 알게 된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날의 비는 격정적이지도 않았고 바람도 없는 날이어서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한낱 스쳐가는 몇 명의 여자 친구와 같았다. 비는 예고도 없이 떨어졌다. 기상청에서도 감지하지 못한 천덕꾸러기 같은 비였다.      


봄을 향해서 달려가는 계절이랄까.


해가 떠 있으면 재채기가 나올법한, 바람이 불면 옷깃을 여며야만 하는 날씨였다. 그러한 날에 예고 없이 쏟아지는 비는 사람을 조금은 조급하게 만들었다. 나 같은 인간은 어느 축에 속하냐면 그다지 급한 면이 없는 인간 축에 속한다. 걸음을 걸을 때에도 다른 이들보다 느긋하게, 밥을 먹을 때에도 천천히, 샤워를 해도 진지하게 하는 편이라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너무 천천히 먹어서 식사를 할 때 지금은 타인과 같이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을 경우, 다른 이들이 한 그릇을 다 먹을 동안 나의 그릇은 아직 3분의 1 정도가 비어있기 때문에 타인의 식사시간에 따라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타인처럼 음식을 빨리 먹지도 못한다.    

  

그렇게 느긋함이라고 해야 할까. 느림이 가득 배인 나도, 하늘에 불만을 가진 신이 여러 군데의 구멍을 뚫어서 예고 없는 비가 쏟아지면 조급 해지는 것이다. 나는 우산도 없이 길거리를 나왔다가 때아닌 비를 피하기 위해 옷 가게의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그날은 무슨 일로 거리로 나왔는지 기억이 없다. 아마도 교보문고에 가려고 나오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매월 초가 되면 으레 교보문고로 가서 잡지책을 뒤적이며 책의 내용을 훑어보고는 읽고 싶은 책을 몇 권 사 온다. 교보문고의 점원들은 나를 알고 있기에(미묘하지만 자주 가서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내가 가면 직접 아메리카노를 추출하여 나에게 권해 주기도했다. 서점에서 뽑은 커피가 얼마나 맛있겠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커피는 눈물을 쏙 빼놓을 만큼 맛있었다. 그렇다고 하지만 서점의 모든 직원이 그렇게나 맛있게 커피를 뽑아내는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 여자 점원이 있는데 그녀만이 커피를 그렇게 눈물을 빼놓을 만큼 맛있게 뽑아냈다. 23세쯤으로 보이는 직원은 얼굴이 아직 고등학생 같은 분위기가 있고 잘 웃어서 누구나 그녀에게는 호감을 지니게 하는 얼굴 타입이었다. 그녀는 내가 서점에 발을 들여놓으면 오늘은 커피가 좀 진하다느니, 잡지 지큐의 내용과 편집이 지난달 같지 않다는 등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의 그러한 다정함은 나에게 어떤 기류를 불러일으켰다.     


비가 오는 날은 카푸치노를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비가 오니 그녀의 카푸치노가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그녀의 다정함은 일주일 만에 그녀와 잠을 자는 상상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그녀에게 저녁 약속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반, 유독 나에게만 말을 많이 해버리는 그녀는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 관한 것은 딱 여기까지다. 그녀는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서 떠날 것이고 나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매달 초순이 되면 교보문고에 들러서 서적을 여러 권 구입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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