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봄이면 무력감에 시달리는 연속의 나날을 맞이한다. 도대체 이 한 없이 떨어지는 결락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무래도 벚꽃 때문일지도 모른다. 벚꽃은 불꽃의 미학을 닮아서 만개와 동시에 무화된다. 화려할 때 꺼지는 불꽃. 삶이란 찬란하게 피어올랐다가 그대로 소멸하고 만다. 벚꽃이 온 세상을 덮어버리는 봄이라 아찔해서 슬프고 기쁘다. 슬프면서 기쁘니까 무력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무기력에도 입맛은 떨어지지 않아서 같은 양의 운동을 매일 조금씩 해도 살은 쪄 버린다. 무력감이 가득한 봄날에는 밥을 비비자. 비밤밥을 해 먹으면 먹는 동안에는 맛있어서 껌뻑 죽는다. 밖에서는 벚꽃 때문에 좋아 죽고, 비빔밥을 먹을 때는 비빔밥 때문에 좋아 죽는다.
봄에는 당연하지만 봄나물이 많이 나온다. 나물을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고추장에 비벼먹는 맛이 좋다. 고추장은 외가에서 담근 매실 고추장이다. 외가 특유의 맛이 있다. 외가가 있는 곳에서 보내주는 모든 음식은 그 지역 특유의 맛이 있다. 이제 그 음식을 매년 몇 번이나 보내주던 큰 이모가 작년에 죽었기 때문에 이제 이 고추장을 마지막으로 그 특유의 맛은 추억만으로 남을 것이다. 있던 사람이 없어지면 그제야 부재가 존재를 증명하게 된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743
돼지고기도 좀 구워서 잘라 넣고 고추장을 넣고 봄나물을 넣고 참기름을 넣고 땡초를 썰어 넣어서 비벼주면 된다. 이렇게 비벼 먹으면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드는데 한 가지 생각은 곧 밀어 버린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맛있어서 좋아 죽기 때문에 무력감을 잊는 동시에 살찌는데? 같은 생각이 동시에 든다. 하지만 이내 뒤의 생각은 발로 밀어 버리게 된다. 어떻든 비벼 놓은 건 다 먹어야 하고, 보통 다 먹고 나면 좀 있다가 한 반 더 비벼 먹게 된다. 인생이란 참 생각처럼 가지 않는다. 가끔 영국 친구인 죠가 오면 이렇게 밥을 비벼주면 오우오우 하며 잘 먹는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작년, 올해도 왔을 텐데 코로나 이전에는 젓가락질도 한층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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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을 잊게 해 주니 비빔밥은 기력의 음식이다. 간결한데 맛은 풍부해서 우리는 가끔 반찬이 시원찮을 때 냉장고를 열어 그 안의 것들을 고추장과 함께 비벼서 먹곤 한다. 가끔 전문가들은 고추장은 모든 맛을 눌러 버리는 강력한 맛이 있기에 비빔밥으로 고추장을 많이 넣으면 고추장 맛밖에 안 난다고 하지만 그래서 어쩌면 비빔밥을 우리는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에서도 고추장처럼 강력한 맛을 한 번이라도 낼 수 있다면 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무기력할 때는 기력의 음식 비빔밥을 크게 와앙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