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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18. 2019

기차에서 만난 그리즐리 8

단편소설




 "그놈도 추운 걸 싫어해서 굴의 아주 깊은 곳에서 살고 있을 겁니다. 여기는 입구 근처라 아주 안전합니다. 안심하세요, 함고동 씨. 한참 굴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 어서 갑시다." 그리즐리는 굴 안으로 개척자와 같은 모습으로 들어갔다. 그는 굴 안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그리즐리의 털을 붙잡고 따라 들어갔는데 굴의 입구가 보이지 않게 되자 두려움이 장막처럼 그를 엄습했다. 굴 안은 야간기차를 타고 내다봤던 밖의 어둠처럼 컴컴했다. 암순응이 풀렸는지 서서히 굴 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리즐리의 눈은 야광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고 그 빛 때문에 동굴 안이 환하게 보였다. 겨울의 차가움과는 또 다른 서늘함이 굴 안에는 흡착되어 존재해 있었다. 서늘함을 등으로 느끼며 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축축한 공기의 냄새가 전해졌다. 축축한 공기 속에서 '끄으으응'하는 아주 더러운 소리가 났다. 정말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달달하고 시큼한, 짜증 나는 냄새가 풍겨왔다. 아마도 그리즐리가 말하는 괄태충의 냄새인가 보다고 그는 생각했다.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드러머가 그의 심장에 방망이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새로 나온 지우개를 포장해서 정혜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때 이후로 이렇게 심장이 뛰기는 처음이었다.


 냄새가 진동할수록 심장은 더욱 심하게 뛰었다. 그리즐리가 앞발로 잠시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100미터 앞에 그놈이 있습니다. 자, 이제는 허리를 조금 굽혀서 가세요, 동굴 벽에 묻어있는 그놈의 점액질이나 타액이 몸에 닿으면 곤란하니까 말입니다."


 그리즐리는 거대한 몸집을 아주 가볍게 허리를 숙인다음에 앞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는 몸에 긴장이 너무 많이 되어서 몸이 뻣뻣했고 걷는 것도 힘겨웠다. 그는 문득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거래처에 가는 것이 맞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내 인생은 밝은 날도 없었지만 이대로 끝나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억울했다.


 뭐 이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는 곰과 거대한 괄태충. 정말 기가 막힌 조합이 아닌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아니었다. 지금 이런 말도 안 되는 행동으로 무슨 나라를 구한단 말인가.    


 "함고동 씨!"    


 함고동이라니, 이름이라도 바로 불러줘야 할 것 아닌가.


 저 곰은 왜 자꾸 나를 함고동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내 이름은 말이야! 내 이름은? 그러니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름이 뭐였더라?


 "함고동 씨, 이제부터 당신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제가 저놈 머리 위의 동굴 천장에 매달려 저놈의 시선을 당신에게로 돌릴 겁니다. 자, 잘 들으세요. 저 괄태충이 당신을 보는 순간 허기로 미쳐 당신을 잡아먹기 위해 함고동 씨 쪽으로 달려올 겁니다. 하지만 괄태충은 아주 느립니다.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망가세요. 괄태충은 빨라봐야 어린아이의 걷는 수준이니 다가오면 한 번에 너무 멀리 달아나지 마시고 십 미터 간격을 유지하면서 달아나세요. 그럼 제가 돌을 들고 당신을 구하러 올 테니까 말이죠. 나를 믿으세요, 함고동 씨."


 그는 마지막에 와서 결심이 굳어지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동굴의 깊은 곳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다. 만약 제대로 무엇인가 해결되지 않아서 괄태충에게 먹힌다면 난 시체도 깔끔하게 지구 상에서 없어지는 꼴이 된다. 아직 제대로 여자와 잠도 자보지 못했는데, 하는 생각이 드니 허탈했다.     


 기운이 한순간에 송두리째 몸에서 쑥 빠져나가 동굴 바닥에 깔리는 듯했다. 그는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즐리는 몸을 숙여 그와 눈높이를 같이 한 채, 그에게 소리 없이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그리즐리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그저 반사 신경 같은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에게 의지는 없었다. 순식간에 그리즐리는 큰 몸을 날려 동굴 안으로 사라졌다.    


 공. 백.


 그리고 침묵.    


 그리즐리가 부재한 동굴 안의 공백은 거대하고 몹시 곰삭았다. 공백과 비슷한 크기의 두려움이 그에게 몰려왔다. 소리 내서 울고 싶었다. 그 짜증 나는 냄새는 더욱 역겹게 몰려왔다. '끄으으응'하는 소리가 확성기에 대고 나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맙소사.


 그와 동시에 그의 심장소리도 더욱 크게 뛰었다. 괄태충의 소리는 손톱이 꺾이면서 유리면을 갈아대는 소리보다 더 기분 나쁜 소리였다.


 끄으으으으응.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동굴 안은 어두웠지만 몇 미터 앞까지는 미미하게 보였다. 그는 커져만 가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앞을 주시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가 폭포수처럼 들리더니 소리가 눈앞까지 온 듯했다. 아마 그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팬티 끝이 촉촉해졌을 것이다. 이윽고 그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그것은 괄태충이라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었다. 크라켄보다 더 흉측하고 마다가스카르 히싱 바퀴보다 더 징그러웠다. 한마디로 괴물이었다. 얼굴은 없었다. 달팽이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몸뚱이는 구더기처럼 허연 몸으로 미끄덩거리는 점액이 온몸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정면으로 보이는 괄태충의 얼굴은, 얼굴은, 얼굴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람이 많았다.    


 울고 싶었다. 왜 그동안 큰 소리로 한 번도 울어보지 못한 것일까. 세상에 태어나서 크게 한 번 울지도 못해보고 저 허여멀건 하고 징그럽고 무섭고 더럽게 생긴 괴물에게 잡혀 먹힐 판이었다. 


 거대한 괄태충은 큰 흡열 판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날카로운 촉수 같은 송곳니 수백 개가 흡열 판을 돌아가며 촘촘히 박혀있었고 다가오면서 돌멩이나 동굴의 불필요한 장애물을 다 씹어 삼키며 그에게로 돌진했다. 눈도 없었다. 귀나 다리, 여타 상상할 수 있는 신체기관은 모조리 배제되어 있었다. 


 그리즐리의 다섯 배는 더 커 보였고 중요한 것은 그리즐리의 말처럼 아기 걸음이 아니라 어른이 달리는 것 같은 속도로, 아니 그것보다 훨씬 빠르게 그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백 미터 앞에 다가온 듯하더니 어느새 오십 미터 앞까지 왔다. 저 멀리, 동굴의 깊숙한 곳에서 그리즐리의 소리가 들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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