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Dec 19. 2019

기차에서 만난 그리즐리 9

단편소설




 "어. 서. 앞. 으. 로. 도. 망. 가. 시. 오."라는 말이 들렸다. 


 그는 뒤를 돌아서서 달리려고 했지만 다리는 그만 자신의 역할을 잊어버렸다. 다리에 힘이 그대로 풀어져버린 것이다. 그래, 먹은 것이라곤 간이역에서 먹은 우동이 전부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지만 내 몸에는 에너지를 생성할 만한 영양분이 부족했다. 그나마 먹은 우동도 기차에 앉아있던 그리즐리를 보는 순간 소화기능 저하로 면발이 불은 채로 위장과 십이지장 어딘가에 원형을 유지하고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펌프질을 했다. 이대로 터져버려라. 그는 엎드린 채 넘어져 고개를 뒤로 돌렸다. 다가오는 괄태충이 자아내는 냄새는 살면서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역겨운 냄새였다. 냄새는 소화되지 않는 우동이 입 밖으로 나오게 구토를 유발했고 속에서 뽀얀 노란 액체를 끄집어내게 했다. 다가오는 괄태충의 흡열 판 주둥이 속은 보이지 않았지만 끈끈한 액체에 천천히 내 몸이 부식되어서 녹아 없어지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괄태충은 20미터 앞까지 왔다. 그는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물며 지금 닥친 이 상황에서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이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대학시절 돈을 빼앗는 아이들을 보고 그냥 지나쳐가지도 못했다. 지나치다 자신에게 그들의 시선이 돌아오는 것이 무섭고 불안해서였다.    


 찌질 한 인생.     


 결국 찌질하고 남들보다 못하게 죽는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막상 죽는다고 하니 우습지만 마음이 어쩐지 조금은 편해졌다. 누구나 한 번은 죽지 않는가. 오늘 죽으면 내일부터 더 이상 죽지 않아도 된다. 누가 한 말이더라?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지만 자신의 이름처럼 누가 한 말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죽는 마당에 그 따위 것에 신경을 쓰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괄태충이 바로 앞까지 왔다. 대단히 크다. 몸속에 살고 있는 기생충이 뻥튀기하는 기계를 통과해서 공룡 만하게 환생한 모습 같았다. 아주 징그럽고 몹시 두려웠지만 체념을 하고 난 후 보니 괜찮아 보였다. 


 나름대로 귀엽기도 했고. 


 거대한 괄태충의 주둥이에서 점액 한줄기가 쏘아져 나왔다. 물 묻은 진흙을 쥐어짜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점액이 괄태충의 주둥이에서 나왔고 자신을 향해 뿜어져 나오는 점액이 닿으면 피식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몸이 쪼그라들어 없어지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상상했다. 


 그것은 도로시가 신고 있는 에메랄드 구두를 빼앗으려는 녹색 마녀 엘파바에게 물을 뿌렸을 때 쪼그라들며 죽는 모습에 오버랩되었다. 구두를 빼앗으려 한 엘파바가 나쁜 마녀지만 사실 도로시가 집을 타고 날아와서 자신의 동생인 동쪽마녀를 죽여버렸다. 어찌 되었던 동생을 죽인 도로시가 밉지 않았을까. 북쪽마녀인 착한 글린다가 도로시에게 옐로 브릭 로드를 따라가면 에메랄드 성에 도착할 것이고 그곳에서 너를 캔자스로 데려다 줄 오즈의 마법사를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글린다도 마법사인데 에메랄드 구두에 담긴 마법을 처음부터 알려주었다면 도로시도 개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글린다는 착한 마녀지만 어린 시절 온몸이 녹색이라는 이유로 엘파바를 따돌린 장본인이었다. 선과 악이 모호한 영화였다. 죽는 마당에 이런 생각은 정말 쓸데없다.    


 이제 나는 엘파바처럼 몸이 쪼그라들어 죽는구나.     


 그는 눈을 감았다. 괄태충의 점액이 그의 몸에 묻으려고 할 때, 몸이 앞으로 쑤욱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느낌은 실제였다. 환상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그리즐리가 와서 누워있는 그의 몸을 앞으로 당겼다. 괄태충이 쏜 점액은 그가 누워있는 자리에 쏟아지더니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엑토플라즘을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 새삼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저 점액에 닿으면 타버립니다. 산성이 대단하거든요.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그리즐리가 말하면서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입구 쪽으로 같이 달렸다. 그리즐리가 이끄니 그의 다리가 어느 정도 움직였다.


 "그리즐리 씨, 제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어요."


 "네, 압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는 거죠."


 "돌은 어떻게?"


 "돌은 못 가져왔습니다. 저 녀석의 몸속에 있는 듯합니다. 게다가 저의 계산 착오였습니다. 저놈은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군요."


 그렇게 말을 하고 그리즐리는 공중으로 한 바퀴 몸을 날리더니 괄태충이 있는 동굴 위의 천장으로 붙었다. 대단했다. 마치 3D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즐리는 무슨 희귀한 손동작을 하더니 무엇인가 괄태충을 향해서 마구 던졌다. 그것을 맞은 괄태충의 몸이 조금은 꿈틀거리는 듯 보였지만 여전히 그를 향해서 소리를 내며 기어 왔다. 괄태충은 또다시 점액을 뿜어냈다. 놀란 그가 피했지만 그의 다리에 점액질이 조금 튀었다. 바지는 금세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갔고 살갗이 벌겋게 익기 시작했다. 


이런 제길, 아주 미세하게 묻었는데 정강이 부분이 타들어 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너무 무서웠다. 심장이 더 이상의 펌프질도 감당하지 못해서 곧 터질 것 같았다. 그리즐리는 휘리리릭 몸을 날려 그의 앞에 다시 섰다. 그리고 다시 한번 희귀한 손동작으로 무엇을 만들어내더니 괄태충의 아가리를 향해 무엇을 던질 기세를 하고 있었다.


 "따라 해 주세요! 마노스!"


 그는 그리즐리를 아프고 불쌍한 얼굴을 하고 쳐다보았다.


 "마노스! 부탁이니 따라 해 주세요."  


 그는 얼떨결에 "마노스……."라고 했다.


 "부탁이니 저처럼 아주 크게 외쳐주세요. 함고동 씨. 마노스!"


 "마노스!"


 그리즐리는 손에 빛이 나는 포자를 만들어서 괄태충의 아가리 속을 향해 던졌다. 괄태충은 점액질을 다시 발사했고 그리즐리는 그를 안고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갈락토만난!" 그리즐리가 외쳤다.


 "갈락토만난!"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즐리는 손 모양을 또 한 번, 기를 모으는 포즈를 취하더니 빛의 포자를 괄태충에게 던졌다. 


 "상아야지만난!" 그리즐리가 쩌렁한 소리로 외쳤다.


 "상아야지만난!" 그가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목이 아프고 눈이 따끔했다. 


[계속]

작가의 이전글 기차에서 만난 그리즐리 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