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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20. 2019

기차에서 만난 그리즐리 10

단편소설



 괄태충의 아가리 속으로 빛의 포자가 들어갔다. 그러더니 아까와는 다르게 괄태충의 몸이 심하게 요동을 쳤다. 급성 맹장염에 걸리면 저렇게 된다. 그리즐리는 그래 됐어!라고 하더니 다시 한번 손 모양을 희귀하게 움직였다. 


 "곤약만난!"


 "곤약만난!"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목이 갈라져라 큰 소리로 그리즐리를 따라 했다. 그리즐리가 지속적으로 괄태충의 아가리 속으로 빛의 포자를 던졌다. 괄태충은 끄아아아악하는 듣기 싫은 소리와 역겨운 냄새를 심하게 풍기더니 몸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서서히 굳어졌다. 10분쯤 지나니 괄태충의 몸이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리즐리 씨,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이제 힘이 다 빠져버렸다. 


 "이것은 글루코만난의 종류인데 분자량의 100만 분의 일로 된 고분자 화합물로 된 소화액입니다. 저 녀석도 생명이 있는지라 죽이지는 못하지만 저놈의 몸속에 소화액을 투화해서 몸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겁니다. 지금 저놈의 몸이 가수분해가 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즐리도 힘이 드는지 숨을 헐떡거렸다. 쉭쉭 거리는 소리가 괄태충에게서 들렸다.


 "그런데 저놈을 가수분해 시키는 일은 나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함고동 씨 당신이 같이 주문을 외워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엣? 그런 말도 안 되는……."


 "정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만화 같은 주문을 누가 같이 외쳐주겠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나를 믿어준 당신의 용기 때문입니다. 주문은 두 명이 선창과 후창을 했을 때 비로소 크게 발휘되는 주문입니다. '엘파바'에게 배워 온 주문입니다." 그리즐리는 씩씩하게 그에게 말했다.


 엘파바?


 이 단어를 생각하는 순간에 그는 정강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입에서 으윽 하는 소리가 자연스레 새어 나왔다. 다리는 점액이 묻은 부분이 벌겋게 되는가 싶더니 구멍이 날 정도로 타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즐리는 털 속에서 무엇인가 꺼내서 그의 다리에 난 상처에 발랐다. 살갗이 타들어가는 것은 멈췄지만 그는 심한 오한을 느꼈다. 얼굴에서 식은땀이 계속 흘렀다.


 "저기, 그리즐리 씨, 돌은? 돌은 어디 있나요?"


 "역시 당신은 본분을 잊지 않았군요. 자 보십시오."


 그리즐리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괄태충의 몸은 점점 작아져서 뱃속에 들어있던, 인간의 머리통만 한 돌이 나타났다. 검은색의 차돌처럼 반질거리는 아주 예쁜 돌이었다. 괴물 같았던 괄태충의 모습은 여느 민달팽이와 같아졌다. 그리즐리는 작아진 민달팽이를 가지고 있던 작은 유리병에 넣어서 뚜껑을 닿고 자신의 털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즐리의 털 속에는 무슨 장치가 있을까. 그리즐리는 돌을 집어 들었다. 


 "이제 나라를 구한 건가요? 그리즐리 씨?" 그는 오한에 몸이 벌벌 떨렸고 정신도 가물거렸다. 


 "그래요, 당신 덕분입니다. 함고동 씨. 당신이 우리나라와 당신네 나라를 구했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영웅입니다."


 영웅? 헛헛했다. 정신이 가물거려 눈앞도 흐렸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저는 이제 죽는 건가요? 그리즐리 베어 씨?"


 "하하, 죽다뇨. 점액질이 묻은 상처가 나으려고 그러는 것이니, 자 이 알약 하나를 드세요. 그럼 잠이 푹 들 겁니다. 잠에서 깨고 나면 모든 것이 제 위치로 돌아가 있을 겁니다."


 그리즐리는 누워있는 그의 입에 알약 하나를 밀어 넣었다. 그는 이 알약을 먹고 나면 영영 잠에서 깨지 못할 것만 같았다.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약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저 멀리서, "당. 신. 은. 영. 웅. 입. 니. 다." 하는 소리가 아주 작게, 작게 들렸다.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는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웬 퉁퉁한 여자가 그를 흔들고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니 기차 안의 의자였다. 기차는 목적지까지 왔다.


 "이보세요, 당신은 악몽을 꿨나요?" 퉁퉁한 여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엣?"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봐요 당신. 제대로 땀을 흘리더군요. 덕분에 전 당신의 땀을 닦아 주느라 쉬지도 못하면서 이곳까지 왔어요." 퉁퉁한 여자가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그런데 당신, 이상한 이름을 외치면서 꿈을 꾸더군요. 그리즐리는 뭐죠?" 여자가 흥미롭게 물었다.    


 그리즐리? 그래, 난 그리즐리와 함께? 꿈이었나? 그럴 리가 없다.     


 그는 기차의 창밖을 보았다. 아침이었다. 기차는 야간 완행으로 가는 무궁화호였고 겨울의 차가운 아침의 풍경이 보였다. 창을 통해 아침햇살이 따갑게 그의 얼굴에 쏟아졌다. 그는 인상을 쓰며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기를 꺼냈다. 퉁퉁한 여자는 버버리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아직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저기 지금은 몇 년도인가요?" 그가 여자에게 물었다. 퉁퉁한 여자는 진홍색의 립스틱이 칠해진 입술로 "2013년 2월이에요. 그래, 꿈속에서는 몇 년도에 갔다 오신 거예요?" 라며 퉁퉁한 여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천구백팔십삼 년에? 간이역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고 올라타서……. 그리즐리는 만났는데……."


 "83년도요?" 라며 퉁퉁한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그는 얼굴에 땀이 흘렀다는 느낌이 있었다. 몸이 무거웠지만 조금씩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 그 해는 제가 태어난 해에요. 그해 나라에 큰 어려움이 있었데요."


 그가 퉁퉁한 여자의 말에 어떤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려는데 기차는 방송을 했다.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했으니 잃어버리신 물건이 없나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잘 가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그가 방송을 들으며 정신을 차려보니 퉁퉁한 여자에게 기대에 있었다. 


 "덕분에 제 버버리 외투가 땀에 젖었네요"라고 했다. 그는 미안한 마음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너무 몸을 구기고 잠들어서 그런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여자에게 잠시 실례한다고 말한 후 전화를 받았다. 퉁퉁한 여자의 미소는 정말 낯익었다. 전화를 받으니 사무실에서 온 전화였다. 거래처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에게는 거래처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거래처에서 앞으로 5년 동안은 죽 거래를 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는 왜 갑자기?라고 말하려다가, 알았다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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