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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y 22. 2021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영화 이야기

부지점장이라는 타이틀을 받았지만 아르바이트와 다름없는 비정규직인 의주는 자기 자신보다 고객들을 먼저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구하고 자신은 용남과 함께 독가스가 올라오는 옥상에 남게 되었는데 밀려오는, 뱃속에서부터 밀려오는 허탈함과 두려움과 공포가 한데 뒤섞여서 눈물부터 터져 나온다. 이제 20대인데 죽음의 공포 앞에, 가족도 친구도 없이 혼자라고 해도 무방할 자신이 내팽개쳐졌는데 거대한 절망 앞에 어찌 의연할 수 있을까.


절망 때문에 이렇게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경우가 어디 이 뿐일까. 살면서 그런 경험을 하거나 하게 된다. 열심히 해보려는데 아무것도 안 되고, 해도 해도 넘어지기만 하고, 사람들은 나에게만 뭐라고 하고, 내 편일 것 같았던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고. 사람들은 숫자와 물질로 나를 측정하려고만 하고. 그러다가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게 되면 절망 앞에서 의주 같은 눈물이 터져 나온다.


어린 시절에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데 둥지에서 떨어진 상처 입은 작은 참새를 보았다. 살려 주려고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작은 생명체가 손바닥 위에서 숨을 헐떡였다. 그때 동네의 할아버지가 나오더니 야생 동물을 인간이 억지로 살려 주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보호를 받고 인간의 먹이를 받아먹고, 인간의 손이 타면 나중에 야생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인간과 야생의 보이지 않는 규율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참새를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규율에 따르기로 했다. 그것이 인간과 야생이 함께 생존하는 길이다. 다음 날 학교로 가는데 참새를 놔준 곳에서 참새는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 그때 얼마나 눈물이 흘렀는지 모른다. 어른들이 말하는 법칙이나 만들어놓은 규율 때문에 참새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자신이 바보 같았다. 비록 규칙에 어긋나더라도 눈앞에 도와줘야 하는 누군가가 있으면 그렇게 하리라.



https://youtu.be/GNT27-22U0U

한, 새리, 창, 란, 이 네 명은 2001년 개봉한 영화 ‘눈물’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의 2021 버전을 보는 것 같은 세진, 주영, 재필, 신지가 나오는 ‘어른들은 몰라요’는 영화 박화영에서 세진이 그대로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나온다.


박화영에서 박화영에게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박화영에서의 세진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방황하며 고통을 매일 겪는 네 명의 청춘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울과 불행과 우울을 한 번에 보여주려 한다. 2001년 영화 ‘눈물’에서 열심히 노력한 청춘들이 2021년에는 밝고 희망차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울타리 밖으로 내몰린 그들은 여전히 시궁창에 빠져서 궁지에 몰리고 폭력을 일삼고 폭행을 당하며 무책임하게 자신들을 버린 부모의 역할을 서로 대신한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의 이런 생활은 시간이 지나도, 세월이 흘러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


내몰린 아이들이 느끼는 슬픔은 보통의 내몰리지 않은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과 다르다. 그들의 슬픔은 하얗고 순백의 도자기 같아서 꽤나 아름답다. 불순물이 전혀 들어있지 않아서, 그래서 그들의 슬픔은 아주 위험하다.


내몰린 아이들의 몸을 찾는 어른은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 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이 모르는 곳에서 오늘도 그들의 슬픔을 채워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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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현실을 반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영화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하고 싶지 않은데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인생이기에 그 현실을 바꾸지 못할 바에는 그 현실에 아주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날씬한 사람만이 대접을 받는 사회를 욕하고 잘못됐다고 말하기보다, 그래 내가 날씬해져서 한 번 보여주지, 라며 날씬한 사람이 되어서 목소리를 더 높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한 영화는 대 놓고 불편하고 한 영화는 이면의 너머의 불편한 진실이 가득하다. 영화가 말하는 건 현실이다. 최불암의 한국인의 밥상을 보면 대부분 그 음식을 만드느라 젊은 시절 고생에 고생을 거듭해서 지금의 이 시점에 온 것이라는 장면이 많다. 고생 고생하며 지내야 했다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시기만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오래된 티브이를 보면 70년대에도 불경기라 힘들다고 했다. 그건 8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90년대에는 괜찮았냐고 하면 그때에도 인터뷰 영상을 보면 불경기라 힘들었다. 그럼 도대체 현실이 힘들지 않고 불행하지 않은 경우가 있을까.


두 영화를 보면 시대가 변하고 시간이 흘러도 비정규직, 부당대우,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가출, 임신, 낙태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건 시대와는 무관하게 유전자처럼 어떠한 집단이나 개체에 발현하여 계속 대물림된다. 피하려고 발버둥을 친다고 해서 피할 수 없고, 고개를 돌린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두 영화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뉴스를 보면 현실은 더 거대한 지옥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고 정치인들이 침을 튀기며 소리를 질러도 이런 유전자적 대물림 악몽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진실이란 불편하고 영화는 그런 진실을 말해야 한다. 역사는 막연한 숫자로 진실을 나타내지만 영화는 구체적인 얼굴로 진실을 말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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