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에세이
여름에 먹어치우는 것 중에 오이가 있다. 보통 오이를 한 네 박스에서 여섯 박스 정도를 여름 내내 먹는다. 여기서 말하는 박스는 라면 박스가 아니라 책 주문하면 오는 박스 정도의 크기를 말한다. 오이를 그 정도의 박스로 네 박스에서 여섯 박스 정도를 먹는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다행히도 오이를 좋아한다.
와그작 씹어 먹고 있으면 내 머리도 아작 깨물어 먹는 것 같아서 상쾌하다. 오이를 그냥 먹는 건 아니고 이렇게, 오이냉국이라고 불러야 할까, 오이물김치?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시원하게 해서 보통 한 번에 두 그릇 정도를 먹는다. 한 그릇은 그냥 먹고 한 그릇은 밥을 말아서 오물오물 먹는다.
단맛도 나면서 시큼한 맛도 나고, 시원한 토마토와 맵삭 한 고추가 코 등에 땀을 맺히게 한다. 그리고 역시 와그작 씹는 오이의 맛이 좋다. 오이냉국은 정말 건강식처럼 보여서 살이 안 찔 것 같지만 뭐든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 게다가 나는 꼭 밥을 말아먹는다. 이게 정말 별미다.
당연하지만 밥은 식은 밥이어야 한다. 탱글탱글하게 밥알을 유지하며 맛있게 먹으려면 식은 밥이어야 한다. 작년부터 코로나 때문에 밀면이나 냉면을 먹기 위해 식당에는 가지 않았는데, 밀면이나 냉면을 먹으러 가면 거기에도 나는 식은 밥을 말아먹는다. 냉면 전문가들이 내가 냉면 먹는 모습을 보면 어쩌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 있지만 나는 가위로 냉면을 잘게 쓴다.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 있게.
그리고 밥을 말아서 숟가락으로 야금야금 떠먹는다. 이렇게 먹으면 소위 냉면 좀 먹는다는 사람들에게 한 소리, 두 소리, 여러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순전히 내 입장에서 먹어본 결과 냉면은 이렇게 잘게 썰어서 거기에 밥을 말아서 숟가락으로 같이 떠먹는 게 훨씬 맛있다.
재미있는 건 한 소리 하던 냉면 좀 먹는다는 주위 사람들도 한 번 먹어보자며 숟가락으로 떠먹어보고는 또 그렇게 해 먹는 사람도 있다. 생각해보면 요사스러운 게, 국밥에는 또 밥보다는 국수를 말아서 먹는 게 맛있다. 국수 면발에 딸려 오는 돼지국밥의 국물이 밥보다는 훨씬 좋다.
매년 여름이면 나를 신나게 만드는 몇 가지가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집 앞 바닷가 퍼브에 앉아 여름밤을 즐기며 칼스버그를 홀짝였지만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퍼브들도 거의 다 사라졌다. 오늘 이전의 여름밤에 맥주를 즐기며 홀짝였지만 오늘 이후에는 이제 맥주도 크게 맛있다고 느끼지 못해 거의 마시지 않을 것 같다. 꺼져가는 여름의 해변을 보며 맥주를 마시는 건 여름의 신나는 일이었다.
또, 다른 계절보다 더 먼 거리를 더 오래, 신나게 달린다. 여름만이 가지는 생명력이 있다. 그걸 느끼고 보며 한두 시간 땀을 흘리며 달린다. 여름이 늘 지속되기를 바라며 시월까지 여름이어라 기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장 신나는 일은 소설을 읽는 것이다. 나는 다른 계절보다 여름에 소설을 많이 본다. 바닷가에서 홀라당 벗고 앉아 피부에서 태양의 냄새가 나도록 뜨거운 햇빛을 잔뜩 받으며 소설을 읽는 게 무엇보다 신난다. 사실 책을 읽거나 조깅을 하는 건 시간이 날 때 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어떻든 시간을 내서 해야 한다.
그리고 저녁에 오이냉국을 먹는다. 이 행복한 맛에 아주 신난다. 여름에는 이런 소소하고 작은 기쁨을 맛보는 것에 아주 만족한다. 그 끝을 오이냉국이 책임지고 있다. 이 시원한 맛, 정말 몇 그릇이라도 먹을 수 있다. 먹고 나면 배가 빵빵해지지만 신난다.
신나는 일이 별로 없어서일까. 나는 고작 이런 일로 신난다. 여름에 잔뜩 먹었으니 이 맛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까지 기억하고 있다가 잊을만할 때 다시 여름에 잔뜩 먹는다. 아마도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는 게 이런 기분이 아닐까.
소리 지르며 스트레스를 풀고 행복함을 충만하게 채운 다음 일상으로 복귀해서 그 행복함은 조금씩 깎여간다. 그리고 다 깎였을 때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다시 공연장을 찾아가서 행복함을 충전한다. 우리 인생은 이런 식으로 순환하는지도 모른다. 내년 여름에는 오이값이 오르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내 마음대로 선곡 https://youtu.be/80nGOu5rCT0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노래, 조휴일이가 부르는 인터내셔널 럽 송. 조휴일이 요즘도 전철 타고 다니나. 1집은 정말 천재가 만들면 이런 앨범이 탄생하는구나,라고 생각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