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만에 몇 가지가 확 달라졌다. 어제까지는 조깅하고 찬물에 샤워를 했는데 오늘은 뜨거운 물이어야만 했다. 어제까지 들리던 매미소리가 오늘 저녁에는 싹 사라졌다. 이중창처럼 귀뚤이와 매미소리가 동시에 들렸지만 오늘 저녁에는 귀뚤이 소리만 들렸다. 정말 하루 만이었다.
잠들기 전 창문을 열어 놓는데 찬 바람이 들어와 이불까지 덮어야 했다. 어제까지는 이불은 덮지도 않고 잠들었는데 하루 만에 열어 놓은 창문 틈으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유튜브로 캐럴을 틀었다. ASMR처럼 한 음으로 된 캐럴인데 온후하고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슬픔이라는 게 꼭 그렇게 강요해야 할까. 정말 슬프다면 거기서 혼자 슬퍼하기도 벅찰 텐데 나에게까지 연락을 해서 같이 슬퍼하자고 해야 할까. 꿈을 꾸다 일어났다. 꿈속에서 슬픔을 강요한다. 슬픔을 강요하는 일들이 근래에는 많아졌다. 모두가 슬픈데 너 하나는 왜 슬퍼하지 않느냐. 공공에 반하는 것이다.라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이름이 없는 것들이 있다. 이름이 없는 것들은 순수하다. 요컨대 돈과 시간에는 이름이 없다. 거기에는 개념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돈과 시간은 아주 무섭다. 세상에는 돈과 시간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매일 보는 자연은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 입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코로나가 세상에 도래한 후 재미있는 건 제비가 날아다니고 이전에 잘 보이지 않았던 메뚜기가 아주 많아졌다. 그 메뚜기를 잡아서 가지고 노는 고양이도 볼 수 있고 강 역시 더 맑아져서 그런지 물고기가 늘어났다. 더불어 낚시꾼들도 많아졌다. 코로나는 인간의 생활을 멈추게 했지만 자연은 더 자연답게 만들었다.
세상의 시끄러움과는 무관하게 하늘은 맑으나 흐리나 늘 아름답고 고즈넉하다. 고요하면서 아늑한 이 느낌은 언제나 좋다. 날은 흐린데 비가 개니 무지개가 희미하게 떴다. 무지개는 자주 볼 수 없는데 무지개가 떴어도 큰 감흥이 없다. 아마도 자주 볼 수 없어서 그러려나. 자주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풍경이 나는 더 좋을까.
무지개 밑으로 비행기가 날아간다. 이런 장면은 좋다. 조깅을 하는 도중에는 잘 멈추지 않는데 멈춰서 눈에 들어오는 이 풍경을 한 컷 담았다. 무지개도 흐린 날에 가려져 거의 희미하게 보인다. 그래도 올해 들어 무지개를 처음 본 것 같다.
사실 현실에서 무지개를 볼 때마다 아직 이곳에서 무지개를 타고 비현실의 세계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과학적인 방법으로, 그러니까 빛의 굴절은 어쩌고 저쩌고 해서 스펙트럼의 입자의 몇 만 분의 일 이상의 인공 빛을 쏘아 어쩌고 저쩌고 해서 또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다. 19년도에 '과학과 사람들'의 원종우 작가의 SF 소설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를 너무 재미있게 읽은 모양이다. 과학적 상상력으로 장편이 아닌 여러 편의 단편 소설을 이렇게나 맛깔나게 적어 내다니 하며 읽었었다. 읽기에 어려웠던 테드 창의 소설보다 쏙쏙 들어왔다. 마지막 편은 나중에 읽어야지 했는데 이제 읽어 볼까 싶다.
태풍이 지나가고 3일 정도 지난날인데 비 때문인지 바닥이 쉽게 마르지 않는다. 낚시꾼들은 비가 온 직후가 가장 신나는 모양이다. 저 끝으로 죽 낚시꾼들이 나와서 낚싯대를 여러 대씩 강에 던져 놓고 입질을 기다린다. 고기를 많이 잡아서 그 자리에서 배를 가르고 손질을 해서 집으로 들고 가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올바른지 어떤지 잘 알 수는 없다. 강물이 고기의 내장이나 머리통으로 더러워지는지, 아니면 그 잘라낸 부위를 다른 물고기들의 먹이로 사용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또 나빠 보이지도 않는다.
낚시도 과학적으로 하면 고기를 쉽게 낚을 것만 같다. 요리와 낚시는 과학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 낚시는 물론 경험과 감이지만 그렇게 하는 요리를 봐도 과학적인 문법이 많이 적용된다. 이번 올림픽에서 수학 선생님이 수학적으로 계산해서 사이클에서 1등을 먹은 것을 보면 낚시는 과학이다. 그래서 낚시 어플을 개발하는 것이다. 어플을 돌리면 지금 현재 날씨와 물 온도, 유속 같은 것들을 AI가 빅데이터로 계산해서 찌 높이, 오늘의 미끼, 바늘 크기와 낚싯대의 위치 같은 것들을 과학적으로 알려준다. 그러면 96%의 확률로 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 ‘뭐든 낚아’ 어플을 구입하세요.
지난 주말이었을 것이다. 8월 들어 며칠 날이 개었는데 그중에 한 날이다. 하늘이 마치 구름이 만들어 놓은 길처럼 보였다. 이제 가을로 접어들면서 사진에는 주로 파란 색감이 가득할 것 같다. 아마도 인디언 써머까지는 이런 색감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산은 곧 단풍으로 붉게 옷을 갈아입는다. 그런 수순이다.
강에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한 풍경이 펼쳐졌다. 오리가족들과 왜가리의 모습이 아주 평화로웠다. 폰을 들어 양팔을 앞으로 뻗으니 오리가족과 왜가리가 저 멀리 도망가는 모습이다. 도망을 가려면 아주 빨리 가야 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태풍이 압도적으로 왔을 때 의자를 어딘가에서 여기 강변으로 이동을 시켜놨다. 덩그러니 보이지만 또 이렇게 보면 하나의 오브제 같다.
밤이 되니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다. 가끔 보이던 인적이 자정을 넘어가니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이곳에 서 있다.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며. 도심 한복판에서도 사람들이 없는 곳은 적요만 가득했다. 사실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누구도 오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는 나 자신을 모르고 지냈다. 어쩌면 지금이 편하게 쉴 때이다. 그저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인지도 모른다. 새벽 2시의 강변은 그야말로 깊은 숲 속처럼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렸다. 강 건너편 아파트의 불빛도 하나둘씩 소거되더니 말 그대로 아. 파. 트. 의 형상만 보였다. 도로에 자동차도 지나가지 않는다. 이 시간은 그런 시간이다. 모두가 잠드는 시간이다. 적요와 고요 그 사이에서 내 몸이 조금씩 융해되어 간다. 나는 이제 비로소 자연에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도대체 매일 어디로 저렇게나 열심히 가는 것일까. 한 곳에 머물러 가만히 있지는 못한다. 심지어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유유자적하지 못하고 낚싯대를 들었다 놨다, 꿈쩍거리고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한다. 고작 백 년도 못 살아서 그럴까. 인간들은 저렇게 좁은 건물 속에 틀어박혀 잠이 들고 날씨의 조그마한 변화에도 노심초사다. 마치 이렇게 고요한 물에 돌을 던지면 일어나는 파문에도 허덕이며 내일을 걱정하며 오늘을 보낸다.
가끔은 가만히 바람을 느껴봐. 그리고 바람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어봐. 우리가 무엇을 진심으로 바라는지.
새들은 하늘 높이 떠서 날아가는데 이렇게 강 위를 날갯짓 없이 비행기처럼 날아가는 모습에는 그만 엄마미소 짓는 중. 이 넓은 강이 너의 집이로구나.
조깅을 하고 평소에 다니지 않는 길로 오는데 다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카센터에서 혼자인 개 한 마리를 만났다. 내가 쪼그리고 앉자, 반갑다며 놀아달라고 애교가 막 흘러넘치는 중이다. 그런데 묶어놔서 나의 손길을 받으려면 이렇게 누워서 필사적이 되어야 한다. 한 3분 정도 목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3분이 넘어가면 헤어지기가 힘들어진다. 개의 눈빛도 몹시 애절하게 변한다. 그러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
강아지의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굉장히 스위트하다고 한다.
잘 다녀와, 기다릴게.
오늘 기분은 어때? 괜찮아?
기분이 안 좋아? 같이 놀까?
배가 고프면 배부를 만큼 먹고 사랑을 주면 마음을 되돌려 주고 감추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내 보일 수 있는, 인간과 다른 생물. 더 이상 동물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인간사회로 들어왔지만 인간일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딱한 생물.
사람은 배가 불러도 더 가지려 하고 사랑을 이용하거나 배신하기도 하며 욕망과 부끄러움을 뒤로 감추려 하는 존재다.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개’를 보면 자신을 버린 주인에게로 향한 눈망울 속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주인을 바라보기만 한다. 이제 곧 헤어지는 것도 모른 채 한 번씩 사랑을 하는 인간과 달리 오로지 평생 사랑만으로 살아가는 개에게는 지금 일어나는 일어 도무지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당신은 개를 키우면 안 된다.
동물의 틈에도 끼지 못하고 완전한 인간도 되지 못한 채 인간화의 경계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동물이 개일 지도 모른다.
고요하다. 그야말로 적막이 감돈다. 평소 강물은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에 떠 있는 나뭇가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비가 우르릉 콰쾅 많이 오면 눈으로 강물의 흐름을 볼 수 있지만 평소에는 세상이 멎은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의 일상이 멎었고 날씨 때문인지 강도 멎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코로나가 도래한 후 인간의 일상은 망가졌지만 십 년 만에 제비도 봤고 메뚜기도 많아졌다. 조깅을 하는데 여기저기서 방아깨비가 계속 나온다. 아주 반가웠다. 조깅 코스에 올라오면 자전거나 발에 밟히기 때문에 방아깨비는 보는 족족 집어서 풀숲으로 보내줬다.
이렇게 적막이 흐르는 모습이 싫어서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휘저어본다. 마아블링처럼 마구 역동적이고 싶다. 일상이여 위로 아래로 옆으로 마구마구 휘몰아쳐라.
사진 속에 사람이 있으면 풍경은 살아난다. 아주 멋진 풍경이라도 사람이 없으면 스토리가 사라진다. 그저 감탄만이 사진 속에 존재하지만 사진 속에 사람이 있으면 생명력과 더불어 감동이 있다. 스토리는 중요하다. 스토리는 단지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한 인간, 그리고 그 한 명 한 명이 모여서 만든 문명에도 스토리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는 거대한 스토리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야만 한다.
인간의 인생이란 반드시 이기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기 위해서 오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 지는가 하는 방식에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확정 지어질 수 있다. 바로 헤밍웨이가 간파한 것이다. 지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도전을 하고 실패를 맛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그런 스토리를 우리는 하나씩 가지고 있다.
오늘도 내 마음대로 선곡 https://youtu.be/oG08ukJPtR8 Michael Jackson, Justin Timberlake - Love Never Felt So Good이다.
마이클 잭슨과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같이 부른 '러브 네버 펠 소 굿'은 마이클 잭슨이 사망하고 나온 노래로 알고 있다. 원래는 마이클 잭슨 홀로 부르는 곡이지만 이 뮤직비디오 속에서는 저스틴과 같이 부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도 같이 불렀다. MJ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한 번 뭉클할지도 모른다. 검색란에 '저스틴'을 치면 비버에게 자리를 양보했지만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눈짓과 몸놀림도 MJ를 떠올리게 한다.